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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May 24. 2022

권규미 시인의 시집 『각시푸른저녁나방』에 대한 단상

파랑파랑 




                                                                                         파랑파랑   







                       “각시푸른저녁나방이 날개를 접고 제 가슴 안쪽의 어둠을 들여다보고 있다”  






권규미 시인은 2009년에 첫 시집 『참, 우연한』을 출간한 이후, 13년 만에 두 번째 시집 『각시푸른저녁나방』을 선보인다. 오랜만에 시집이 출간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독자들은 이 시집과 만나게 될 때, 여러 지점에서 세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예순 넘게 나를 이끌고 다닌 뾰족한 맨발 앞에 무릎을”(「이슬이 비치다」) 끓게 된다는 다소 침울한 시어도 그렇고, “예순 해를 굴러도/ 순해지지 않은 눈과 귀/ 부르튼 맨발”(「“당근 한 조각 천원”」)이 언급된 것도 그렇다. 예순은 이순耳順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공자는 이 시기를 귀가 순해져 모든 말을 객관적으로 듣고 이해하는 시기라고 말했지만 시인에게 있어서 ‘예순’은 그렇게 순조롭지 않다.




예순 해를 흔들려도 잎사귀 하나 피우지 않은 나무였던 나다 바람과 눈발의 해안에 발이 묶여 이름 모르는 섬 하나도 불러보지 못한 배였던 나다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예순 해였다


                                                                                                                「배후」 부분 




시인은 오랜 시간 흔들리며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반복해서 보냈지만 단 한번도 “잎사귀 하나 피우지” 못했다고 읊조린다. 해안가에 발이 묶여 “이름 모르는 섬 하나” 자유롭게 불러보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꽃을 피우고 잎과 나이테를 넓히는 것이 나무로서 삶을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흐름일 텐데, 그러한 기본적인 행위마저 이행할 수 없었던 것은 시인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삶 자체로의 이행도 쉽지 않았음을 알려 준다. 대상에게 이름을 붙이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항구에서 벗어날 수 없는 폐선廢船처럼, 발이 묶여 있었던 탓에 주변을 자세히 바라보고 관찰하지 못했다. 그러니 명명할 수 있는 의지 섞인 행위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처럼 시인에게 예순 살까지의 긴 여정은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렇다면 독자들은 의심 없이 그녀가 걸어온 시간이 순탄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의 시집 속에는 ‘슬픔’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사랑은 슬픔이어서 울다가 깨어보면 훌쩍 키가 자랐다”(「감자를 캐는 아침)라는 표현도 그렇고, “구름의 슬픔을 깁던 나무들의 이야기는 빗방울에 갇혀 오래”(「月印」) 떠났다는 표현도, “바위그림 속 말안장이나 화살촉처럼 더듬거리는 마음보다 풍경이 먼저 휘어지는 건 오래된 슬픔 그 빗방울 탓”(「겹」)이라는 표현도 그렇다. 이 해설에서 ‘슬픔’과 관련된 표현이나 작품을 모두 나열할 순 없지만, 분명한 것은 권규미 시인에게 슬픔의 메아리는 두 번째 시집을 운용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그러니 독자들은 그녀의 ‘슬픔’이 어떤 방식으로 변주되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시집은 어떤 방법론으로 펼쳐지는가. 하나의 방법론이 시집에 수록된 모든 작품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겠지만, 일정 부분 강한 에너지로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해보자. 이 시집의 구상은 어떻게 흘러가는가. 나는 그것이 ‘꿈(상상)’꾸는 행위를 통해 그려지는 변주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꿈(상상)’을 하나의 방법론으로 지금 이곳의 현실과, 현실과는 사뭇 다른 또 다른 현실의 조각을 붙여 새롭게 현실을 그려내는 방식이 그것이다. 현실에서의 결핍을 ‘희망’이라는 다소 막연한 바람을 통해 구멍을 채우는 것처럼 시인이 운용하는 언어에는 이러한 바람이 담겨 있다. 그러니 독자들은 ‘상상’의 형태로 출현하는 표정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녀의 시를 읽고 있으면 하나의 조각이 다른 조각으로 성실하게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조각이 이질적인 물질과 붙여진 채 연결된다. 시인은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명랑하게 옮겨 앉는 새”(「싱잉볼」)가 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다소 무리하게 연결되는 장면에서는 현실을 또 다른 현실로 재현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물론, 이와 같은 이행은 시인의 바람만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 힘을 오래도록 유지하기 위해 시론적인 맥락에서 자신의 마음을 이곳과 저곳에 투영했다. 우리는 위트 있게 이와 같은 방법론을 ‘벌어진 ‘사이’를 잇는 것’ 즉, ‘사이’의 콘택트contact라고 부를 수 있겠다.




육십 몇 년 만에 아니 삼십 육억 년 만에 드디어 나는 한 적소에 당도 했네


한 때는 달의 모서리에 찍힌 손톱자국이었고 가시나무 가지를 맴도는 묽은 새소리였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남루한 조각햇살이었고 깊디깊은 우울을 품은 바람의 멍든 발자국이기도 했지만


사각거리는 고요의 손바닥 위 나비처럼 가벼운 무릎과 무릎들의 시간 그 앞에 나는 말랑말랑 즐거운 나무 한 그루였다 시시비비의 무늬가 마알간 수틀속처럼 눈부시게 찰랑거리는 뜨거운 오후였다


어떤 시간의 마디에는 굴렁쇠처럼 구르는 은빛 시작이 있다고 했던가


손톱이 까만 이방의 소년도 기우뚱 분홍 무릎을 꿇는 늙은 낙타도 물과 바람과 빛의 풍화속에 묵묵히 발을 담그고 지금 막 한 계절을 지나는 중이어서


......


내게도 분홍무릎이던 때가 있었다 활짝 핀 꽃처럼 한 생애를 열어 풀잎내음이 나는 여행자를 업고 타박타박 모래언덕을 넘던 날들이 내게도 정말 있었다


부르튼 갈기를 어루만지며 수억 겹의 생애가 명멸하는 깊고 투명한 사막의 눈을 본다 발자국 위에 발자국을 쌓으며 다시 바다와 바다의 꿈을 꾸는 다정한 바다사자 한 마리가 내 앞에 있다


                                                       「분홍무릎」 전문

 



이 시는 한 때 우울하고 건조했지만 자신에게 꼭 그런 날들만 펼쳐졌던 것은 아니라는 맥락의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이렇게 읽으면 재미가 없다. 시인이 사용했던 방법론을 의식하고 읽어 나갈 때, 오히려 더 흥미롭다.


육십 년 만에 적소適所를 찾은 화자의 처지는 적소를 찾을 때까지 여러 방식으로 변주된다. 예를 들어 2연에서 적적한 시절의 모습은 “달의 모서리에 찍힌 손톱자국”으로, “가시나무 가지를 맴도는 묽은 새소리”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남루한 조각햇살”로 “우울을 품은 바람의 멍든 발자국”으로 펼쳐진다. 이러한 표현들은 정서적인 측면에서 유사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같은 감정이 아니다. 시인의 말을 빌려오자면 “세상의 모든 포도를 한 통 속에 가두는 포도”(「적막의 배후」)처럼, 투박한 시선이 아닌 늘 항상 다르게 표현되는 ‘포도’ 송이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런 차이를 의식하면서 작품을 읽을 필요가 있다.


역시나 유사한 방식으로 정서는 다르지만 적소를 찾고 난 후, 긍정적인 감정을 같지 않는 방식으로 배치한다. 3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고요한 시간 앞에 “말랑말랑 즐거운 나무 한 그루”가 되거나, “눈부시게 찰랑거리는 뜨거운 오후”가 되어 보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시간은 “굴렁쇠처럼 구르는 은빛”처럼 무엇인가 힘 있는 시간으로 펄럭인다.

화자는 이 공간에서 자신의 삶을 돌보며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한다. 그런데 타진하는 방식 역시 시인이 설계한 창작 방법 안에서 펼쳐진다. 평범한 문장으로 시를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동일하지만 다른 표정으로 동일한 감정을 미세하게 설계한다. “손톱이 까만 이방의 소년”이 “기우뚱 분홍 무릎을 꿇는 늙은 낙타”와 어울리는 것처럼 말이다. 끝내는 이러한 존재들이 고난을 통과한 후, 일어서게 된다.


화자는 “지금 막 한 계절”을 지나가고 있다고 말하며 자신을 추수린다. 그러면서 미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가능성’을 제시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단순히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그만의 이미지와 표현 방식으로 여러 층을 나누어 건축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권규미의 시를 빠르게 읽기 힘들다. 느리게 천천히 읽었을 때, 재미를 확보할 수 있다. 그러니 독자들께서는 다급한 태도를 피하고 천천히 여유 있게 읽어 주시라.





줄남생이 같은 감자알들 안간힘을 쓴 듯

이마 위 주름살 팽팽하다 온 몸 까슬까슬 별이 박혔다


처음엔 물방울처럼 작고 맑았을

햇병아리 심장처럼 콩콩콩 뛰었을

손톱조각 뜬 야윈 어둠도 바다 같았을


모든 사랑은 슬픔이어서 울다가 깨어보면 훌쩍 키가 자랐다

각진 마음도 둥글어지고 그만큼 세상의 틈이 헐거워졌다


그만큼 나의 자리가 순해진 것

시간과의 사이가 조금 가까워진 것

어둠이 조금 물러나 준 것

별들이 스스로 제 키를 줄여 준 것


햇살의 젖꼭지에 매달려 우르르 몰려나온

감자알같이 어린 신들 앞에 저절로 몸이 낮아지는 아침이다


                                         「감자를 캐는 아침」 전문




이 시집에 수록된 첫 번째 작품이다. 이 시도 시인의 방법론과 함께 읽으면 흥미롭다. 앞부분에서 그녀의 창작 방법을 ‘‘사이’의 콘택트’라고 언급한 바 있다. 여기서 ‘사이’라 함은 비슷한 정서가 전혀 다른 표현을 통해 조우한다는 맥락이 담겨 있다. 이 작품도 이런 방식과 동일하게 운영된다.


시인은 감자 캐는 장면을 자신의 삶과 나란히 연결시킨다. 감자 캐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삶을 움켜잡는다. 감자를 캐본 사람은 감자를 끌어올릴 때, 감자알들이 힘겹게 매달려 올라온다는 사실을 안다. 여기서 감자의 힘겨움은 ‘힘겨움’이라는 실제 감정을 표현한 것이기보다는 뿌리에 여러 알맹이가 끌려 올라오는 시각적인 장면(힘겨움)을 담아내기 위해 적혔다. 화자는 이러한 순간을 “이마 위 주름살 팽팽하다”라는 표현으로 한 사람의 힘겨움을 그려 놓는다. 주름살이 팽팽해지기 위해서는 치아齒牙와 이마에 강한 힘을 쏟아야 하는데, 시인은 그 애씀을 이미지를 통해 시로 옮겨 놓은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그 애씀은 “온 몸 까슬까슬 별이 박혔다”라는 표현처럼 땀방울로 재현된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노력으로 끝나지 않는다. 감자를 수확하는 행위는 결국에는 시인의 성장成長과 어울린다. “물방울”, “햇병아리 심장”, “손톱조각 뜬 야윈 어둠”은 ‘첫’과 같은 흔적으로 작은 감자알에 해당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위축되고 작았던 화자의 처지와 다름없다. 하지만 위의 작품에서는 이 작은 존재가 성장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물론, 여기서 성장은 길이나 높이가 아닌 심적인 성장과 관련이 있다. 모든 사랑은 “슬픔이어서 울다가 깨어보면 훌쩍 키가 자랐다”라는 표현이나, “각진 마음도 둥글어”진다는 표현이 그것을 증명한다.


화자는 이러한 성장을 두고 자신 주변에 맴돌던 어둠이 밀려났다거나, 나의 자리가 순해졌다고 말한다. 그러니 화자에게 감자를 캐는 일은 ‘나’를 응시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고, “몸이 낮아지는” 경이로운 순간과도 만난다. 시인은 한 때, “이 마을 저 마을 실없이” 떠돌며 “내가 너무 멀리” 떨어진 것처럼 느껴져 “가파른 꿈속”(「곰곰」)을 헤맸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렇지 않을 것 같다. 가끔은 시인의 삶에도 여유가 찾아올 것 같다. 그러니 이 시집을 읽는 독자들은 시인이 무장한 방법론을 의식하며 화자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성장시키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이 방법이 이 시집을 즐기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고민을 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시인은 대체 누구인가이다. 서두에서 시인이 슬픔을 매개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고 피력한 바 있지만, 이 정보만으로 시인의 얼굴을 만져봤다고 볼 수 없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이 정보를 수집하는 방법 역시 직설적인 단어로 시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변주된 비유나 이미지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시인은 “한때 나는 추운 나라의 나방이었다 때때로, 한기寒氣처럼 쏟아지는 저녁”(「가시푸른저녁나방」)이었다고 적는다. 역시나 ‘나’는 동일하지만 추운 나라의 ‘나방’이 ‘나’가 되기도 하고, 추운 겨울날 센 바람을 버티는 ‘저녁’이 ‘나’로 명명되기도 한다. 이처럼 화자의 현실은 좀처럼 순조롭게 흘러가지 않았다.


누군가가 시인에게 소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펑펑 쏟아지는 눈발처럼 한없이 울어보는 것”이라고 대답하거나, “하염없이 가벼워져”(「슬픔에 대한 예의」) 보고 싶다는 발언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녀의 지난날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가족들을 그린 시편에서도 이러한 감정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부모님을 요양병원에 보내게 되는데 그 당시의 감정을 “덫에 걸린 너구리마냥 제 그림자 뱅뱅 도는 상한 짐승 한 마리 내 안에”(「덫」) 있다고 표현한다. 이처럼 시인에게 있어서 자신의 삶은 “일생이 순간인 흩날리는 눈송이처럼 가파른 스무고개”(「바벨도서관」)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기저에 깔린 이러한 심리로 인해 그가 쳐다보는 대상 또한 온전한 형태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녀가 바라본 대상은 하나 같이 적적한 형태로 펼쳐진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도 늘 항상 지속되지 않는다. 시인이 이 감정을 온전히 응시할 수 있다는 것은 극복의 차원을 품고 있음을 의미한다. 슬픔 자체를 슬픔 자체로 응시하게 되는 것은 건강한 시선을 갖게 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것은 고독을 즐기는 것과 무관하지 않고, 외로운 감정과 친숙해지는 것이니 오히려 더 여유롭게 느껴진다. 이처럼 소중한 시간이 시집에 쌓인다는 점에서 흔들리는 순간들을 부정적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 누군가가 예술을 잃어버리고 이데올로기를 얻은 것처럼, 권규미 시인은 행복을 밀어내고 시집을 얻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상처를 쏟아 낸 시집이야말로 새로운 기쁨이다.


이 시집의 또 다른 핵심 포인트는 ‘경주’라는 지역을 배면에 깔고 있다는 점이다. 직접적으로 특정한 지역이 거론된 것은 아니지만, 그림자처럼 지역을 숨겨 놓고 있어서 ‘경주’로 상징되는 흔적을 찾는 것은 독자 입장에서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지역 분권화 시대에 권규미 시인의 시집은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경주’의 풍경을 자신만의 호흡법으로 작품에 스며들게 한다. 인간의 심리와 마음을 공간이 지배한다는 점에서 지역의 종교적인 향기가 시집에 스미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다.


시인에게 있어서 시는 무엇일까. 벗어날 수 없는 악력握力일까. 13년 전에 출간된 그녀의 첫 번째 시집을 지금 다시, 넘겨본다. 첫 시집에 적힌 ‘시인의 말’에서 그녀는 “내가 나인 것이 고맙다/ 그대가 그대인 것도 감사하다/ 우연히 닿은 섬인지도 모르겠다/ 생이라는 것”이라고 적었다. 시인의 말처럼 삶이라는 것은 어쩌면 ‘나’로 온전히 살 수 있어서 감사한 것이고, 당신에게 향할 수 있어서 마냥 고마운 것인지도 모른다. 삶이라는 것은 그렇게 어울려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오래전에 시인은 “가난한 마음 비집고 날마다 걸어 나가는 나가서는 어디에 무엇 되었는지 감감 무소식이었던 나”(「잃어버린 나를 찾다」)에 대해 그려놓았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그녀가 그려낸 ‘나’는 예전과는 다를 것이다. 시인은 예순의 시간 동안 진정한 나를 찾았을까. 이 과정을 탐닉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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