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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May 31. 2022

희망가

장우원 시인의 시집 <수궁가 한 대목처럼>에 대한 단상 



                                                                          



                                                                                         희망가






엄마이별가족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주고받으며 즐겁게 몽상하던 시절이 있었다. “목소리는 하나인데 네 다리, 두 다리, 세 다리로 걷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정답은 인간이라는 것이 매우 낯설게 느껴졌지만, 머릿속으로 이해하며 정말로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 인간의 생로병사가 온전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튼튼하게 성장하고 그 이후엔 점차 줄어드는 우리들의 모습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시간은 더디면서도 쏜살같다는 점에서 이 수수께끼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다. 장우원의 이 시집도 그런 흔적을 곳곳에 숨겨두고 있다.


가령, 시인은 “까닥 정신줄 놓거나/ 먼 길 떠나면”(「아버지보다 더 살고 보니」) 자신의 존재를 유일하게 증명해주었던 세금 통지서나 어느 단체의 문학잡지들, 또는 동료 문인들의 개인 시집 발송으로부터 이제는 “서서히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시선 속에는 삶과 죽음의 풍경이 어렵지 않게 포착된다. 한 노인의 죽음을 그린 제목 자체가 「풍경」인 것도 그렇고, 이제는 “부고를 알리는 문자”가 제법 많아졌다고 고백한 「겨울」도 그렇다. 무엇보다도 엄마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다.


시인은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시집 첫 번째 작품에 담아 놓았다. 엄마의 육신은 예전처럼 활발하지 못했던 것 같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처럼 홀로 걷기도 힘드셨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엄마를 요양 병원에 옮기는 일은 어떤 느낌일까. 미안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할 것이다. 한편으론 조금은 숨통이 트일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나를 길러주고 품어 주었던 엄마를, 늘 항상 내 편에서 나를 지켜주셨던 당신을 집이 아닌 요양병원으로 거처를 옮기는 일은 누구에게나 마음 편한 일은 아닐 것이다. 무엇인가 커다란 죄를 짓는 느낌이랄까.



당신을 위해 그런 게 아닙니다.


모두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힘들어서

그래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제

편히 주무십시오.


꿈이 깨면

육신의 무게가 사라졌음 좋겠습니다.


어머니


                             「요양 병원 침대맡 기도」 전문



이 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화자는 솔직하게 자신의 심뇌心惱를 털어놓는다. 당신을 위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모두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힘들어서/ 그래서 그렇습니다.”라고 고백한다. 동시에 “꿈이 깨면/ 육신의 무게가 사라졌음” 좋겠다고 말한다. 여기서 육신의 무게는 엄마의 무게겠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반어임에 틀림없다. 반어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복잡한 심정이다. 화자는 요양 병원 침대 맡에서 어머니와 마주한 채 기도를 드리며 한 사람의 생을, 어머니의 생을, 이렇게 응시한다.


잠시 생각해보면 힘들더라도 엄마가 건강한 모습으로 내 곁에 있어주길 시인은 바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누구나 한 번은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끝’을 엄마 역시 피해 갈 수 없다. “사라지기 전/ 가벼워지”(「낙엽단상」)는 낙엽처럼 엄마도 나풀거리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흔들리셨다. 엄마가 이곳에 계시지 않으니 화자는 엄마에게 닿고 싶지만 닿을 수 없는 목소리로 “어머니 잘 들어가셨는지요”(「부치고 싶은 편지」)라고 종종 묻는다. 엄마는 아버지와 함께 편히 쉬고 계실까. 이처럼 시인에게 그리운 당신은 여러 방식으로 변주되어 시집 속 곳곳에 흐른다.


이 시집에서 ‘계보系譜’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는 것이 흥미롭다. 시인의 집안은 ‘녹내장’으로 많은 고생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큰 형님, 셋째 형, 막내 동생이 녹내장으로 고생했다는 가족력에 대해 적혀 있다. 녹내장은 눈目의 질환 중에 하나로 심해질 경우 시력이 저해되면서 실명이 될 수도 있는 무서운 병이다. 화자의 집안은 이런 병을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물려받게 된다. 훈장이라든지 멋진 가훈이 아닌 ‘병’을 물려받는 집안 내력은 무엇인가 삶을 보다 더 애처롭게 만드는 것 같고 두렵게 만드는 것 같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조건 때문에 삶을 더 슬기롭게 살아가게 되는지 모른다. 죽음을 응시하는 것처럼, 늘 항상 병을 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그런데도/ 잘 견뎌 왔군/ 잘 건너왔어// 이순을 앞두고 생각하니// 잘 견뎌 왔어/ 이 두려운 가계도 家系圖”(「계보系譜」)라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은 앞으로도 가계의 운명에 맞서 당당히 살아갈 것 같다.



인정쓸모



이 시집에서 눈길이 가는 것은 문학과 관련해 나의 정체성을 묻는 장면이다. 그것은 ‘쓸모’와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쓸모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다. 어느 단체가 나에게 문학상을 수여해 주는 것이 쓸모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나의 작품을 빌려와 시비를 세워, 먼지가 될 때까지 긴 시간 동안 내 이름을 뽐내주는 것이 쓸모일까. 하지만 이것은 쓸모가 아니다. (쓸모가 아닌) 진정한 쓸모가 되는 법은 상징적인 권력에게 인정을 받기보다는 그러한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자유로워질 때 오히려 선한 상징들이 달라붙는다. 이것은 자명하다.


물론, 긍정적인 맥락에 놓인 상징이 부정될 요소는 아니다. 하지만 인위적인 인정보다는 누군가가 나의 작품을 기억하고 나의 작품을 진솔하게 읽어주는 것이 더 의미 있다. “나보다 더 애틋이/ 내 시를 사랑한/ 아내와/ 벗 하나 있어// 여기 담아/ 고마움을”(「시인의 말」)전하고 싶다고 시인이 말한 것처럼, 쓸모는 이런 방식으로 널리 퍼져야 한다. 시인은 작품으로 살고 작품으로 죽는다. 이것은 불변의 법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다. 어느 한 철학자가 말하지 않았던가. 당신이 아닌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고 말이다. 그러니 자신의 작품이나 연구서 또는 에세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반복적으로 읽히고 여러 번 소개되거나 노래로 만들어진다면 고마운 일이다. 시인들은 자신의 시집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길 진심으로 바란다. 이것은 숨길 수 없는 너무나 당연한 바람이다. 하지만 시인으로서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다. “팔리지도 않는 시집”(「나는 시인이다」)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것이 다반사다.



고장난 시계

가지 않는 시계

안 가는 시계

못 가는 시계

멈춰버린 시계

건전지가 다한 시계

건전지를 갈면 가는 시계

갈 수도 있는 시계

건전지를 넣어도 갈지 안 갈지 알 수 없는 시계


내 이름 석 자도 이와 같으니


                  「호명呼名」 부분



화자는 자신을 고장 난, 가지 않는, 안 가는, 못 가는, 멈춰버린, 건전지가 다한, 건전지를 넣어도 갈지 안 갈지 알 수 없는 시계라고 고백한다. 짠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시인은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아냈지 아니한가. 당당히 옳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먼 훗날에 누군가가 당신의 이야기에 귀기울여 들어줄지 누가 아는가.


시인의 죽음은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니라, 나의 작품이 사람들에게 읽히지 않는 것이다. 당신에게는 당신의 문학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 그리고 당신을 기억해 주는 마음씨 좋은 사람이 여전히 건강하게 주변에 있으니 움츠릴 필요는 없다. 그러니 다시 일어서자. 봄날 산비둘기가 운다고 생각하지 말고, 비둘기 역시 기분 좋게 구구구구 거린다고 받아들이자. “연둣빛 새싹 너머/ 추위에 말라죽은 가지만”(「춘래 유감」) 보인다고 말하지 말고, “벌써 왜 이순인가”라고 말하지 말고, 다시 힘 있게 세상을 쳐다보자. 당신은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다.



재미위트동화


이 시집에서 또 다른 흥밋거리는 ‘지렁이’, ‘달팽이’, ‘거북이’, ‘기차’, ‘참새’와 같은 대상을 시적 소재로 끌어와 재미나게 익살스러운 감각을 동화와 같이 담아낸다는 사실이다. 시인은 앞서 자신의 나이가 ‘이순’이라고 말했지만, 이런 작품 앞에서는 나이가 무색해진다. 다소 쓸쓸하고 슬픈 정서가 담겨 있는 이 시집에서 숨통을 트이게 해주는 것 같다. 그러니 반갑게 맞이하게 된다.



기어가는

달팽이 한 마리


우주의 시간을 등에 이고

천천히

자전하는 중


지구는 그저

그의 몸 바닥에 붙어 있을 뿐


그의 몸은 그저

지구를 굴리고 있을 뿐


           「달팽이의 시간」 전문



달팽이 한 마리를 화자는 관찰한다. 달팽이는 느리고 끈끈한 몸을 밀고 움직인다. 시인은 달팽이가 집을 이고 가는 장면을 “우주의 시간을 등에 이고/ 천천히/ 자전”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을 가볍게 생각할 수 있으나, 달팽이를 관찰하는 사람의 입장으로 돌아가 움직임을 응시한다면 신기할 수밖에 없다. 탄생할 때부터 자신의 집을 지은 채 살아가는 달팽이의 운명도 그렇고, 그런 운명으로 인해 몸이 무거워져 발걸음이 느려졌을지도 모른다는 즐거운 몽상도 그렇다. 달팽이가 달팽이로 보이지 않는다. 신비한 존재로 뒤바뀐다.



기차를 기다리며

철로는 빛난다.


바퀴와 싸운 곳은

녹슬지 않는다.


녹슬지 않기 위해

제 살을 내어준다.


제 살을 내어주며

온 힘으로 견딘다.


오는 것들 거부하지 않고

가는 것들 잡지 않는다.


살을 에일 듯

빛나다 사라지는


기차는 먼 곳부터 두드리며

두려움과 함께 온다.


          「기차를 기다린다」 전문



이 작품은 역동적인 기차와 기차에게 길을 내주는 철로와의 관계를 다룬다. 시인은 물리적인 관계에 놓인 철로와 기차의 관계를 한 사람의 긍지와 연결해 풀어낸다. 이 지점이 재미있다. 우선, 철로는 단순히 기차를 움직이게 해주는 교통수단에 불과하지만, 철로에 인격을 부여하면 사정은 달라진다. 철로는 자신의 몸을 늘 항상 녹슬지 않게 자신의 맨살을 “내어준다.” 때론 온 힘으로 철로를 “견딘다.” 오는 기차도 가는 기차도 “거부하지 않고” 붙잡지 않는다. 이러한 성격으로 보았을 때, 철로는 굉장히 쿨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무겁고 육중한 존재를 온몸으로 버티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니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임을 확인할 수 있다. 기차는 철로에게 시련과 아픔과 두려움을 제공하지만 철로는 “기차를 기다리며” 오히려 당당하게 빛난다. 그런데 이 기차는 시인의 모습과 다름없다. 이 철로를 보면서 그는 굳게 마음을 다잡았을 것 같다. 그러니 당신은 ‘이순’을 두려워하지 말라.



기술식욕동물


사는 것이 만만치 않다. 시대마다 사연이 없는 시대도 없다. 누군가는 늘 항상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이야기하지만, 그 시절은 그 시절로 머물러 있을 뿐, 지금 이 순간만큼 강렬하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


새로운 기술과 문명이 펼쳐지는 포스트-휴먼 시대에선 예전과는 낯선 장면들과 조우한다. 예를 들어 화자는 이 시대의 새로운 육아법이 생겼다고 말한다. 그것은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말귀로 손길로 눈길로 우는 아이를 달랬지만 요즘은 “핸드폰을 쥐어”(「이 새대의 육아법」) 주며 엉엉 우는 아이를 달랜다. 간편하다. 이런 풍경 자체를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시인은 스마트폰을 손쉽게 건네는 것보다 사람의 따뜻한 온정과 애정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컴퓨터 기능인 컨트롤 V와 컨트롤 C도 마찬가지다. 이 단축키는 ‘복사’ 한 것을 어려움 없이 있는 그대로 ‘붙일’ 수 있는 기능이다. 한마디로 손쉽게 옮기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기능을 어린아이들이 손쉽게 배운다. 이것 또한 비판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인의 입장에서 걱정이 된다. 어떤 한 대상을 옮기거나 재현하는 것이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영혼”(「스마트 세상」)에 이런 생각이 고정된다면 어떤 한 존재의 고귀한 영혼이 훼손될 수도 있는 것이다. 시인은 그렇게 믿는다. 그의 이러한 우려는 학교 선생님으로 재직하면서 느꼈던 애정 어린 마음과 무관하지 않다.


이 시대는 또한 바이러스로 인해 곤욕을 치르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이러스를 물리 칠 수 있다고 믿었던 인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온몸으로 채득 했다. 보이지 않는 미세한 바이러스는 막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사람을 멀어지게 만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인류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지만, 어김없이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은 찾아온다는 점이다. 화자는 “마스크 너머로” 따뜻한 햇살을 맞이한다. 바이러스가 우리들에게 알려 준 것은 무엇일까.


시인은 “멈춰 섰다 생각하라는 뜻”(「봄이 참 힘들기도 하다만」)으로 받아 드린다. 이 혜안慧眼은 틀리지 않다.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은 멈추게 되었고 이 멈춤으로 인해 잃은 것도 상당히 많았지만, 얻은 것도 있었다. 대기질이나 수질이 좋아진 것이 대표적인 예다. 공간과 시간을 넘어서는 메타버스와 같은 기술 매체의 결합(익숙함)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시인의 말처럼 우리가 잠시 멈추었을 때,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직선이 아닌 “구부러진 직선”(「걸으며」)의 방식으로 다르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런 재난의 시대에서도 인간의 식욕만큼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당대의 ‘먹방’ 문화는 그것을 잘 반영한다.



명태 사체를 발라 먹는다

곤이와 애

잘 보관된 냉동 부속들 함께


봄비 무척 많이 내리는 밤


오리 소 돼지 닭

여기저기 널브러져

심탐深耽하는 사람들


병원 영안실 근처

싱싱한 사체를 알리는 간판들

맛있는 사체를 권하는 불빛들


죽은 것에 질릴 때쯤

산 것들 찾아가는 입들


멍게와 오징어는 움직이는 채

껍질 벗긴 광어는 생살 예쁜 채


밤은 그렇게 깊어 간다

비는 그렇게 하수구로 흘러든다


              「포만 직설」 전문


화자는 먹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죽은 것에 질릴 때쯤/ 산 것들 찾아가는 입들”에 대해 생각한다. 영안실에 방문한 목적과는 무관하게 사람들은 산 것과 죽은 것을 가리지 않고 먹어댄다. “봄비 무척 많이 내리는 밤”에 말이다. 한마디로 봄밤에 그들은 잔인한 드라큘라가 된 것이다. 그러니 이 작품은 ‘동물권’과도 연결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인간은 못 먹는 것이 없는 최상위의 포식자이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코로나19의 원인이 명확하게 규명되지는 않았지만, 동굴 속에 있어야 할 ‘박쥐’을 식용으로 먹기 위한 인간의 욕망이 이곳에 바이러스를 전파한 것으로 추측된다. 인간은 이렇게 잔인하다. 모순인 것은 잔인하면서 자유를 외치고, 꿈을 이야기하고, 타자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사랑을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노동약자바람


장우원의 시집에서는 ‘노동자’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여기서 노동이란 인간의 가치를 말한다. 교환 가능한 숫자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존재 그 자체를 말한다. 자본, 정권, 기업, 국가에 짓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우선”(「사람이 먼저다」)시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인의 이러한 바람은 자연스럽게 노동자 전태일을 떠올리게 하고, 지금 이곳의 노동자들의 모습을 응시하게 만든다.


“실시간 배송조회 시스템”(「붉은 발자국」)을 문제 삼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더 나아가 시인은 여전히 민족의 아픔인 분단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인의 이러한 발언은 과거의 흔적을 손쉽게 잊어서는 안 된다는 발언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현대사의 아픔을 시인은 외면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러한 의지는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희망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듯하다. 그는 「희망가」를 통해 낮은 위치에 있는 존재들을 다시 호명하려고 한다. 12월의 마지막을 보내며 새해에는 무엇인가 달라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 바람은 사글세 반지하에, 노숙인 바람막이 박스 안에, 비정규직 출근길에, 해고로 피멍 든 가슴에 “햇살, 고루고루 따뜻하게”(「희망가」) 퍼지는 것이다. 시인의 이런 마음이 아카시아 꽃향기처럼 널리 펴져 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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