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당당하고 씩씩하게
연민은 힘이 세다. 연민은 그 어떤 감정보다도 위대하다. 어떤 방식이든지 이 감정은 우리를 붙들게 만든다. 지나가던 누군가를 멈추게 하고 관심 없던 대상에게 관심을 쏟게 만든다. 그렇다. 이 감정은 타자를 흔들어 관심을 유발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이 감정을 무조건 믿을 수 없다. 때론 맥없이 쓰러지기도 한다. 나보다 타자가 낮은 위치에 놓여 있거나 동등할 때 샘솟는 감정이니 그렇다. 위치가 역전되거나 동등하다는 인식이 사라지면 이 감정은 무섭게 도망친다. 그때 우리는 동일한 대상을 쳐다보아도 더 이상 연민이 샘솟지 않음을 경험한다. 동일하지만 동일하지 않은 대상과 마주하는 것이다. 흐르는 시간이 원인일 수도 있고, 역전된 상황이 이유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더 이상 당신을 통해 ‘나’의 모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짧은 리뷰에서는 연민과 관련된 작품에 대해 쓸 예정이다. 물론, 여기서 ‘연민’은 필자가 함부로 동정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응원에 가깝다. 정식 웹툰에 도전하고 있는, 진행 속도가 더딘(?),�김길규�(이하 ‘길규’로 표시)의 웹툰 「발버둥치다」가 그것이다. 길규는 웹툰을 시작하면서 “지나치게 솔직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라고 적었다. 그리고 첫 회에 “우울증을 앓고 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포문을 열었다. 길규는 지금으로부터 3년 전, 2019년 5월 24일 그런 계획을 세웠다. 작품 제목 자체가 ‘발버둥치다’이니 독자들은 그의 간절함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길규의 이런 다짐과는 다르게 작품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속도가 붙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안’일까. ‘못’일까. ‘안’보다는 ‘못’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될 듯하다. 나는 길규가 속도를 ‘안’ 냈다고 또는 ‘못’ 냈다는 뉘앙스를 품겼지만 내 발언은 수정되어야 할지 모른다. 이 작품은 어쩌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완성될 수 없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느리고 느리게 독자들은 웹툰이 진행되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길규의 고백처럼 우울증은 좀처럼 물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증상은 몸에 기생하는 곰팡이 균처럼 한번 찾아오면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좀비와 닮았다.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현재 오트사부아(Haute-Savoie)에 살고 있는 마드무아젤 카롤린의 작품 『추락, 우울증 심연 일기』(2018)는 그것을 증명해 준다. 주인공 카롤린은 우울증의 심연으로부터 회복과 자유를 갈구했지만 끝내는 곁에서 응시해야 할 대상으로 받아들인다. 그녀는 엄지와 검지 사이에 ‘가위(X)’ 타투를 새겨 그 자국을 볼 때마다 ‘평온 절정’ 훈련을 감행한다. 문신文身을 새기는 행위는 잊고 싶지 않은, 그 무엇을 기억하겠다는 맹세의 행위이니 죽을 때까지 노력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방법은 어둠이 자신을 삼키는 방식에 저항해 어둠 속으로 직접 뛰어드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카롤린은 새로운 길을 찾는다. 궁극적으로는 이 과정을 그림으로 옮겨 자신을 치유한다. 치유가 아니더라도 ‘나’를 살리려고 애쓴다. 그러니 길규 역시 최선을 다해 지금 이 순간까지도 ‘우울증’을 응시하고 있겠다. 어떤 방식이든 행복은 중요하니까. 행복은 무조건이니까.
행복을 두고 타협할 수 없으니까.
독자들은 그런 작가를 응시하면서 자연스럽게 연민의 감정을 발동시키게 되고 그를 응원하게 된다. 지금 이 순간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마찬가지다. 작가 또한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길규는 7화에서 “자극적인 소재라 하더라도 안 보는 경우가 허다해 사람들이 네 만화를 읽어 주는 건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어쩌면 길규라는 캐릭터가 어떻게 자라는지 궁금해서가 아닐까?”라는 상담 선생님의 발언에 걷던 걸음을 잠시 멈춘다. 길규 또한 이 대목에 힘을 실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진행 상태는 어떠할까.
지금 현재 이 작품은 37회 연재되었다. 길규는 히키코모리(引き籠り)처럼 집 밖을 나가지 못한다. 매일 자고 또 잔다. 씻는 것이 힘들어 한 주 동안 씻지 못한 적도 많다. 집이라도 깨끗하면 마음이 편할지도 모르겠지만, 청소 또한 쉽지 않다. 길규는 무기력한 일상을 보낸다. 길규가 키우는 반려 고양이 ‘포야’와 식물도 마찬가지다. 마음을 주지 못한다. 그런 상태를 닫힌 상자로 비유하는 게 흥미롭다. 상자를 열기 위해 애쓰지만 상자가 열리지 않는 마음 상태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운 좋게 상자를 열 수 있을지라도 상자 안에 또 다른 상자가 숨겨져 있다. 답답함이 목을 조른다. 그래서 길규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죽음 속에서 다양한 경우의 수를 헤아린다.
때론, 성 정체성이 길규를 흔든다.
하지만 이 웹툰은 길규의 무너짐만을 기록하지 않는다. 상처가 낫는 과정을 곳곳에 숨겨 둔다. 그것은 바로 길규가 웹툰을 통해 자신을 그리는 행위 자체다. 이 과정 속에서 길규는 처음으로 자신이 키우던 ‘포야’를 챙기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런 다짐이 있었던 순간 포야는 수의사에게 안락사를 권고 받는다. 사랑할 준비가 되었는데, 사랑할 존재가 눈앞에서 사라져야 하니 길규는 힘겹다.
그러나 그때부터 길규는 애정(의지) 쏟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러니 길규의 삶에도 큰 변화가 있을 것 같다. 따라서 한 명의 독자로서, 글을 쓰는 평론가로서, 길규의 삶을 자연스럽게 응원하게 된다. 이것은 연민일까. 단순한 응원일까. 포야의 죽음에 대해 다룬
37화에서 길규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네가 덜 그리워지진 않겠지만,
이 슬픔을 다룰 줄 아는 성숙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렇다. 이 다짐처럼 길규의 모험이, 길규의 삶이, 길규의 성숙한 모습이 <발버둥치다>를 통해 더 자주 만나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당신의 이야기가 두툼한 책으로 옮겨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나는 37편의 <발버둥치다>를 읽고 구독을 결심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클릭’해 보기를 권한다. 당신 또한 마찬가지로 길규를 응원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길규와 같이 ‘우울증’으로 인해 힘겨운 삶을 살아 내는 길규‘들’에게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이 마음은 ‘나’와 ‘당신’에게 하나의 작은 혁명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