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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Jul 26. 2022

[문종필의 오늘 만화]- 느리게 걷기

타니구치 지로(Taniguchi Jiro)의 <산책>.

타니구치 지로(Taniguchi Jiro)의 <산책>.



장르적인 측면에서 만화와 문학과 영화는 자신만의 표현 방식(형식)을 갖고 있다. 특이하게도 모두 같지 않다. '표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만이 동일하다. 서로 다른 장르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동시대 예술과 담론을 끌고 가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의 겉모습은 한결같이 모두 다르다. 그런데 다르다는 측면에서 장르보다도 더 다양한 결이 있다. 그것은 예술가라는 한 사람의 독특한 살결이다. 그러니 '나'를 표현한 모든 진정한 예술은 고유성을 품는다. 교환불가능한 이러한 특징을 아이덴티티(identity)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그래서 평론가들은 가려진 그들의 '차이'를 읽어내기 위해 애쓴다. 겉으로는 만져볼 수 없지만, 숨겨져 있는 진실이나 흔적을 명명하고자 힘낸다. 물론, 오독할 수도 있지만 오독은 오독 나름대로 창조적인 영역에 속한다.


만화의 영역도 마찬가지다. 만화를 그리는 만화가들의 취향과 성격에 따라 다양한 만화가 펼쳐진다. 앨리슨 백델(Alison Bechdel)처럼 무수히 많은 말과 긴 서사로 자신의 작품을 운용하는 방식이 있는가 하면, 4컷 정도의 짧은 만화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경제적으로 운용하는 '요요나나'의 인스타 만화도 있다. 반면에 만화에서 중요한 형식인 말풍선을 과감히 포기하고 칸의 내부와 외부를 적절히 활용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만화도 있다. 그러니 고유한 숨결을 지닌 만화가들의 작품을 읽어나가는 행위는 '차이'에 대한 명명 행위일 수밖에 없다. 일개의 보편적인 이론으로 작품을 볼 수 없는 이유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멈춰 선 채, 방문한 작은 서점에서 타니구치 지로(Taniguchi Jiro)의 <산책>을 천천히 넘기게 되었다. 우리에게 그는 <고독한 미식가>로 유명하다. 이 작품은 책의 제목처럼 산책하는 과정에서 만날 수 있는 소소한 흔적을 담았다. 가령, 10화에서는 낯선 골목길에서 길 헤매는 할머니를 도와준 일, 13화에서는 어떤 한 학생이 의자에 놓고 간 분실물을 찾아 준 일, 16화에서는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은 후, 목욕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누군가는 이러한 평범한 서사가 매력적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평범한 삶이 쉽겠는가.

무엇보다도 만화적인 형식을 의식한 채, 만화가가 연출한 칸과 칸의 흐름을 상상해보면 새롭게 다가온다. 즉, 씬과 칸이 살아서 움직이게 되는 것을 경험한다. 영화는 영화관에서 봐야 한다고 말이 있듯이, 이 말의 역도 가능할 것 같다. 타니구치 지로의 만화는 인쇄된 종이책으로 넘길 때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만약 그의 작품이 웹툰에 업데이트되었다면 이러한 긴장은 전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책의 구조 속에서 칸과 칸이 영화의 흐름처럼 치밀하게 직조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소한 이야기 속에는 소소한 것에만 머무르지 않는 번뜩이는 순간들이 숨겨져 있으니 독자들은 그것을 느껴보는 것도 좋겠다. 무엇보다도 느리게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

<산책>은 17화로 끝맺지만 책에는 두 편의 에피소드가 더 있다. “아무것도 안 걸리는 게 좋다”며 낚시하는 욕심없는 할아버지 이야기와 봄날의 기운이 너무 좋아 목적지보다 한 정거장 먼저 내려 산책한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것은 모두 '산책'이 가능하기 때문에 만질 수 있는 여유다. 각박한 현대사회에서 '여유'를 논하는 것이 어불성설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작가는 우리에게 한번 정도 멈춘 채 주변을 돌아보라고 권유한다. 사라졌던 내 마음속에 다시 '여유'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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