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어느 한 출판사에서 출간한 신간 서적을 읽었다. 동성애를 다룬 만화였는데 불쾌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동성애를 주제로 다루는 것은 나와 다른 타자를 이해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으니, 이 작가의 선한 의도와 배려는 의심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의 의지를 응원해줘야 마땅하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고 적은 것일까. 그 이유는 동성애를 소재로 그린 작품이 독특하거나 특별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존에 나와 있는 작품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새로운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새로운 것을 강조하는 것이 무례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이 작가는 너무나 손쉽게 동시대 담론을 쫓아가 적당히 안착하려는 제스처를 보였다. 당대의 담론을 흡수해 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자신의 예술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힘겹게 쌓아 올린 공든 탑에 숟가락 하나 올려놓고 주목받으려고 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간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이렇게 반복적으로 써내는 것은 작가 본인은 물론 책을 출판하는 출판사에게도 책임이 있다. 오히려 편집자들과 출판사는 특정한 담론을 쫓기보다는 다른 목소리로 자신을 표현하는 예술가들에게 더욱 많은 기회를 주어야 한다. 물론, 나의 이러한 생각이 오판일 수 있으나, 대상에 대한 어설픈 연민과 동정이 오히려 더 위험해질 수 있다는 입장을 관철하고 싶다. 만화와 그래픽 노블에 이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 '나' 또한 예외일 수 없다는 생각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지만, 불만을 표현해야 할 것 같았다. 이런 몽상을 하다가 우연히 유디트 바니스텐달의 『당신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동안』(2022)을 읽게 되었다.
이 텍스트는 책 제목이 암시해 주듯이 후두암 진단을 받은 다비드가 목소리를 잃게 되는 과정을 다룬다. 만화는 다비드의 끝을 지켜보는 가족과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다비드의 모습을 애정 있게 끌고 간다. 여기서 애정이라고 표현한 것은 세 가지 요소 때문이다. 우선 이 그래픽 노블은 말풍선과 대화를 과감히 줄이고 선과 색과 그림으로 분위기와 감정을 탁월하게 연출했다. 작가는 내면을 표현하는 데 있어 굳이 언어가 필요하지 않음을 만화의 형식으로 증명한 것이다. 독자들은 이 부분을 음미해 볼 수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음미하는 과정에서 빠른 독해는 불가능해진다. 독자들은 칸과 칸 사이에 숨겨진 많은 감정을 소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다음 요소로는 시적인 언어다. 죽음을 앞둔 다비드는 자신의 어린 딸 타마르와 마지막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이 여정 속에서 죽음을 응시해 본 적이 없는 타마르에게 삶의 끝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장면은 뭉클하다. 작가는 이처럼 이야기와 어울리는 시적인 언어를 적재적소에 배치한다. 마지막 요소로 이 만화 배경이 안락사를 금지한 '독일'이라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목소리를 잃은 다비드는 의사인 친구에게 안락사를 부탁한다. 친구는 그의 부탁을 처음엔 거절하지만, 끝내는 윤리적인 선택을 감행한다. 이러한 장면은 상투적일 수 있는데, 작가의 연출된 그림과 선을 쫓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비드'라는 한 인물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된다.
의도치 않게 이 글에서 서로 다른 두 작가를 비교하게 되었다. 동시대 담론도 유행도 나무랄 것이 못 된다. 때론 가장자리에 놓인 존재들에 대해서 우리 모두 힘을 쏟아 정치적인 맥락에서 노력해야 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이런 선한 의지 이전에 '나'가 정말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내가 잘 표현해낼 수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누구나 의도를 품을 수 있지만, 그것을 재현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냉정한 발언일 수 있으나 독자는 바보가 아니다. 유행을 쫓아가다 보면 정작 내 것은 돌보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