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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Aug 09. 2022

만화가 류승희 『그녀들의 방』(2019)에 대한 단상

흑백으로 펼쳐진 그녀들의 삶

류승희의 『그녀들의 방』(2019)은 단편이지만 단편이 아니다. 모두 엮여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이 책을 단편이 아닌 장편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어느 이야기 하나 독립적으로 나열되지 않는다. 그녀는 이 이야기를 붙들고 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며 쓸쓸해한다. 가끔씩 당시의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 책상 서랍 속에 숨겨 놓는다. 상처에 매몰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조근 조근 다가가 옛 대상들과 손을 맞잡는다. 오랜 시간 만화가는 이 작업을 수행했다. 추억은 쌓였고 두툼해졌다. 시간이 흘러 2019년 5월의 어느 날, 이 책은 드디어 출간되었다. 여행을 소재로 20대의 끝과 서른 사이에 놓인 방황하는 인물에 대해 다룬 첫 번째 책 『나라의 숲에는』 이후, 6년 만이다.


이 작업이 가능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그 시절을 기준으로 멀어진 시간 감각이 작용했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지난날의 표정도 한몫했다. 풍경 속에서는 풍경을 제대로 응시할 수 없으니 풍경 밖에서 풍경을 응시하기 까지 좀 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야기를 탐닉할 줄 아는 작가의 기질은 만화의 톤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다시 책상에 앉아 만화를 그릴 수 있게 두 아이를 돌봐주신 엄마의 역할이 크다. 『그녀들의 방』은 이런 요소들로 뭉쳐져 출간되었다. 그렇다면 이 만화는 어떤 내용을 품고 있는가. 만화가는 어떤 과거를 꺼내놓을까. 그것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아빠 없이 엄마와 함께 반지하에서 살아가는 진영과 선영과 미영이에 대한 진솔한 서사이다. 그래서 책 제목이 그녀들의 방이다. 그러면 각각의 인물들이 버틴 계절은 어땠을까. 



큰 언니이자 첫째인 진영은 서점에서 일한다. 진영은 이곳에서 오랜 시간 일하며 집에 버팀목이 되었다. 동생들의 급식비를 챙겨 주었고 아버지가 없는 빈자리를 엄마와 함께 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는 결심한다. 서점 일을 그만 두고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기로 한 것이다. 서점 일은 더 이상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진영은 미래를 꿈꾸고 싶었다. 하지만 집에 머물러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것은 만만치 않다. 몇 번의 낙방 후 학원가에 가 독하게 공부를 해보기도 했지만 매번 벽에 부딪친다. 진영은 가족들에게 미안하다. 20대의 끝을 의자에 앉아 이렇게 보낸다.  


낙방에 낙방을 반복하는 언니가 미웠나보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집에 도착한 동생은 빈정거리며 “언니과일 먹자고 말한다.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하고 왔으니, 집에서 공부만 한 당신이 과일을 깎아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발언이다. 고독하고 힘들게 공부한 언니는 기분이 상한다. 하지만 과일을 깎아 내놓는다. 그러니 언니는 속이 더 타들어 간다. 이 복잡한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까. 그렇다고 해서 동생들이 언니를 미워한 것은 아니다. 언니가 시험에 떨어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린 동생들은 “그때마다 가난이 두껍게 내려 앉은 것을 경험해야 했다. 그러니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더 미웠을 것이다. 어쩌면 동생의 이 말은 언니 조금 더 힘내! 라는 말로 바꾸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진영의 캐릭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외출 후, 반지하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문 옆에 있는 계단을 직접 세었던 씬(sin)이다. 언니는 동생에게 묻는다. “너 우리 집 내려오는 계단이 몇 개인지 알아? 동생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지만 언니는 정확히 알고 있다. 그만큼 언니의 마음은 순탄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계단을 직접 센다는 것은 이곳의 현실을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응시하는 것과 다름없으니 말이다. 언니는 동생에게 “여덟 개야.라고 대답한다. 이 말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담겨 있다. 다행히 만화의 끝은 벽에 주저앉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랜 도전 끝에 언니는 합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자들은 벽에 마주한 진영의 표정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평범한 우리는 ‘벽’ 하나쯤 품고 있다.


동생 선영은 대형서점 안에 소속된 다이어리 매장에서 ‘성공’을 판다. 미래의 흔적을 적는 다이어리를 판매하고 있으니 성공과는 거리가 먼 선영의 상황과는 대조적이다. 반어적인 공간에서 선영은 일한다. 그녀는 친구와 함께 “숯 매트를” 만드는 공장에서 한때 생산직 단순 업무를 하기도 했다. 숯 알갱이가 든 티백을 스펀지 패드에 붙인 후 매트 천에 찢어지지 않게 넣는 일이다. 대학에 들어갈 학비를 벌기 위해서였다.


이 공장에서 일했던 순간이 매번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그곳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아르바이트생들에게만 잘해준다고 아주머니들이 실장에게 불만을 표시했던 것이다. 이 마찰은 직접적인 것이기 보다는 구조적인 것이다. “항상 예외”였던 아르바이트생과 직원과의 괴리를 반영한다. 하지만 선영은 자식 걱정하는 아주머니들의 대화를 엿듣게 된 이후, 마음이 달라진다. 공장에서 일하는 엄마의 모습과 겹쳐졌기 때문이다. 결국, 나와 너와 당신은 큰 차이가 없다. 선영은 이런 힘겨운 방식으로 “아홉 번의 겨울을넘는다. 선영은 아빠가 원망스럽다. “00학번이 되었더라면아버지의 사업이 망하지 않았더라면…….이라고 수없이 홀로 되뇌인다. 그에게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만화’를 놓지 않은 것이다.


이 만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지만 미영도 등장한다. 진영과 선영의 삶이 넉넉지 않으니 막내 미영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영은 대학생이다. 언니들과 마찬가지로 먹고 살기 위해 애쓴다. 그녀는 한 때 방을 구했다. 조건을 따질 겨를이 없는 것은 너무나 뻔하다. 그러니 학교 선배가 빌려 준 공통주택에 머물기로 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다. 하지만 머물게 된 공동 주택에선 온기를 찾을 수 없다. 위험할 뿐만 아니라 변태들이 기웃거린다. ‘공동’이니 함께 나누는 것이 맞지만 나누는 것이 없을뿐더러 대화조차 없다. 옆방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가장 가깝지만 가장 멀게 느껴지는 감정을 안고 미영은 한 계절을 보낸다.


미영은 이곳이 불안하다. 어느 날, 공동 주택에 누군가 들어와 소리를 지르며 거주자들의 방문을 두드린다. 미영은 방문을 열지 못한 채 몸을 움츠린다. 미영은 그 사건이 있었던 날, 이곳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미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도 가끔씩 작은 우물 같았던 그 방을 떠올린다. 말이다. 미영은 무사히 졸업했을까. 지금은 다른 곳에서 여유 있게 살고 있을까. 미영의 이런 사연 역시 우리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엄마는 이런 딸들과 함께 삶을 살아간다. 아이엠에프(IMF)로 인해 당시 경제는 휘청거렸다. 아버지의 사업이 망한 것도 이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아빠는 방에 들어가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무기력했다. 밤이면 밤마다 술 취해 쓰러졌다. 이런 사람을 엄마는 위로해야 했고 무엇보다도 아빠의 역할을 도맡아야 했다. 그러니 만화가는 “고목이 돼버린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류승희 만화 에세이 『오늘도 잘 살았습니다.』에는 엄마가 되어버린 화자가 지난날의 엄마를 회상하는 흔적을 찾을 수 있는데 오묘하게 거시기하다. 독자들은 작가의 눈에 비친 엄마의 모습을 직접 만져보시길 바란다.


다시 『그녀들의 방』(2020)으로 돌아간다. 이 만화의 주인공인 엄마 진영 선영 미영의 삶은 ‘가난’이라는 연결 고리에 묶여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해 가족들은 준비 없이 어려운 환경에 놓이기 때문이다. 준비라도 할 수 있었으면 당차게 살아낼 수도 있었겠지만 번개처럼 갑작스럽게 불행이 찾아왔다. 그래서 힘겨운 삶을 살아내야 했던 이들의 삶은 짠할 수밖에 없다. 부족해도 꿈과 희망을 쫓아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니 시작부터 주인공들은 흔들린다. 가난하다는 것은 혹은 형편이 여유롭지 않다는 것은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든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가난’이다. 이런 가난의 모습을 류승희는 담담한 어조와 그림으로 ‘섬세하게’ 풀어냈다. 여기서 섬세하다는 것은 중요한데, 그 이유는 류승희의 그림과 언어가 ‘순간’의 오묘함을 잘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러한 몸짓은 하이쿠에서 배운 것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만화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의미 있는 ‘씬’이다. 직접적인 사진은 아니지만 품고 싶은 장면이 여럿 있었다. 그녀들이 살던 반지하 집 마당 풍경(66쪽)이나 속이 팡팡 뚫리도록 배드민턴을 팡팡 치던 장면(98쪽), 더 나아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 할 때 학원 옥상에서 바라본 멋진 밤풍경(162~163쪽) 그리고 이 만화의 마지막 장면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재미도 정밀한 그림도 좋지만 이런 명장면들이 만화에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류승희는 소소하지만 이런 장면을 잘 담아낼 줄 아는 만화가 같다. 그녀는 만화책 속에 시(詩) 한 편 그려 놓는다.  



이 만화의 또 다른 특이점은 흑백 필름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작가는 충분히 이 책을 칼라로 인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편집자 또한 이 지점을 오랜 시간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최종적으로 ‘표지’마저도 흑백을 선택했다.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흑백 톤이 ‘과거’의 흔적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지금과는 다른 ‘과거’의 모습임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과거의 흔적이 현재까지 소급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어두운 반지하의 삶이 류승희 만화가의 삶을 옥죄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행위는 위험하다. 이 만화의 마지막 단편 「또 한번의 계절」에서 엄마 진영 선영 미영은 모두 ‘함께’ 어깨를 붙인 채, ‘곁’에서 호흡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말 그대로 추억에 불과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류승희의 최근 에세이집에서는 ‘과거’가 아닌 일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실은 앞의 우려를 덮는다. 지금, 이곳에서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더 이상 과거에 매몰되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러니 독자들은 『그녀의 방』 이후의 새로운 작업을 기대해도 좋다.


대단한 작가가 아니어도 괜찮다모든 풍경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우니까



작가의 이 말을 비틀어 다른 언어로 변주해 본다. 대단한 사람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모든 삶은 그 자리에서 서 있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고 말이다. 류승희의 다음 작품을 손꼽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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