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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Sep 09. 2022

에리크 스베토프트의 〈SPA〉

기괴한 은유로 바라본 이곳의 삶



매대에 그래픽 노블이 깔린 서점을 방문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새로운 신간을 구입한 뒤, 차분하게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방구석에서 값진 만화책을 넘기는 것은 지상 낙원이나 다름없다. 더불어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 놓여 있다면 금상첨화다. 내게 이런 여유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겠지만, 이 순간에 집중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데 만화를 이렇게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떤 만화는 각 잡고 기 쓰며 읽어야 한다. 기는 아니더라도 대상에 대한 존중과 정성스러움이 필요할 때가 있다. 최근에 읽은 뫼비우스의 『에데나의 세계』(2021)와 옥타비아 버틀러의 원작을 데이미언 더피가 각색하고 존 제닝스가 그림을 그린 그리픽 노블 『킨』(2022)이 그랬다. 두 텍스트를 읽고 난 후, 내 방식대로 운용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 두 작품보다도 좀 더 기괴하고 흥미롭게 다가온 텍스트가 있다. 스웨덴 출신의 에리크 스베토프트의 〈SPA〉가 그것이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한 작품은 무의식과 꿈을, 다른 한 작품은 페미니즘 연장선상에서 흑인 여성의 삶을 재조명했다는 데 의의가 있었지만, 〈SPA〉의 경우 기괴하고 몽롱해서 무엇인가 더 애정이 갔다. 그래서 난해한 이 작품을 만화적으로 느끼고 싶은 오기가 생겼다. 평론가로서 어떤 방식이든지 써보고 싶은 욕망이 치솟은 것이다. 하지만 이 작가에 대한 정보가 흔하지 않았다. 〈SPA〉 이외의 다른 텍스트를 찾을 수 없을뿐더러, 스웨덴어를 하지 못하는 처지라 번역에 대한 완성도를 논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나와 독자들은 정공법으로 텍스트를 응시할 수밖에 없다.


만화를 읽는 방법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칸과 칸 사이의 여백을 상상력으로 채워보는 것이다. 문학과 더불어 말풍선에도 언어가 있으니, 상징적인 언어를 셈해보는 것은 당연하다. 이처럼 만화는 영화처럼 정보를 주는 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독자 스스로 칸과 칸 사이에 끊어진 상상의 영역을 채워 나가야 한다. 셈하는 것에서 건축하는 것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칸들의 연출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탐닉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만화는 우리 곁에 살아 숨 쉰다. 그때야 텍스트는 문을 열고 이곳에서 편히 쉬라고 손짓하며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그렇다면 〈SPA〉에서 독자들은 가장 먼저 무엇을 느껴야 할까. 그것은 바로 소외疏外된 존재의 삶이다. 이 책에는 그런 존재들이 유령처럼 텍스트를 배회한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따라서 이 존재들이 겪은 곤혹스러움과 부담함을 독자들 스스로 헤아려 본 후, 이들의 삶을 상상하고 공감해야 한다. 그럴 때, 만화는 더 힘껏 우리에게 상상력을 제공한다.



이 만화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는 스파다. ‘SPA’는 최첨단의 시설을 갖춘 곳으로 오아시스(oasis)로 명명된다. 편하게 오성급 호텔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이곳은 고객들에게 새로운 경험과 감동을 선사한다. 그러니 ‘SPA’을 방문하는 고객들은 편하게 여가를 즐기면 그만이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화려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한결같이 흔들린다는 사실이다. 위태롭다고 표현해도 좋다. 예를 들어 깨끗한 수건을 각각의 부서에 채워 넣는 일을 하는 어느 한 직원은 본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옷이 더럽혀지게 되고 매니저는 그 광경을 지켜본 후, 수치스러운 방식으로 그를 훈육한다. 동료들 역시 암묵적으로 이 방식에 동의한다. 이러한 태도는 그를 더욱더 비참하게 만든다. 정성 들여 음식을 요리한 주방장은 까다로운 고객에 의해 자신의 음식이 거부당하자 너무나 손쉽게 동료 직원으로부터 실패자라는 낙인을 받는다. 이처럼 화려한 이면에 가려진 그림자 같은 존재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복수와 원한을 점점 더 키우게 되고 끝내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은유(괴물)화 된다. 이처럼 인물들의 억눌린 감정은 이 만화를 통째를 기괴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만화가의 이러한 연출은 ‘SPA’에서 일하는 직원들뿐만 아니라 운영하는 당사자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려준다. 결국, 작가는 먹고 먹히는 세계에서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익살스럽지만 다크한 은유로 전달한다. 난해한 이 작품의 세부적인 연출을 모두 느꼈다고 볼 수 없지만, 이런 세상이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풍경이라는 생각도 든다. 유령은 존재하지 않지만 짓눌린 유령이 넘실대는 사회에 살고있는 것이다. 에리크 스베토프트는 〈SPA〉에서 호로적인 형식을 끌고 와 이곳의 풍경을 만화의 형식으로 옮겨 놓았다. 독자들은 꼼꼼히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의미을 찾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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