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을 가정가정하게
BL(Boys Love)을 읽는 행위는 낯설다. “남성 독자와 중년 이상 연령층”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탓이다. 알려지지 않았다기보다도 이들은 열렬한 BL 독자가 아니다. 그러한 탓에 일반적인 남성 독자의 경우 BL에 대한 데이터를 쌓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읽는 행위 자체가 조금은 어색하다. 그러나 BL이 단지 내게 친숙하지 않다는 점에서 외면할 수 없다. “십 대에서 삼십 대 정도의 젊은 여성 독자들과 일부 중년층 여성들에게 BL은 다양한 형태로 쉽게 접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독자층이 이렇게 두텁다는 것은 BL을 통해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어떤 방식이든지 이 장르는 비평의 대상에 들어온다. 비평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장에서 두드러지는 ‘징후’나 ‘사건’에 관심을 갖고 이곳의 풍경을 다양한 방법으로 응시하는 행위이니 그렇다.
BL에 대한 연구서나 평론을 읽는 과정에서 우연히 접한 인상적인 구절이 있다. 그것은 미조구치 아키코의 책 『BL의 진화론』에 쓰인 구절로 “BL은 일면으로는 남성 캐릭터들을 통해 여성들이 여성으로서 자신들의 현실에서 도피하여 자유자재로 러브와 섹스를 즐기기 위한 이야기”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남성 독자들의 경우, 이 부분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진다면 “여성이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부과된 여성의 역할로부터 해방되어 남성 캐릭터에 가상으로 자신을 기탁함으로써 자유자재로 사랑과 섹스”를 즐기는 장르로 투박하게 받아들여도 된다. 즉, BL은 억눌린 감정이 무의식처럼 파생된 것으로 ‘꿈’이나 ‘얼룩’과 같은 은유로 읽어도 무방하다. 특히, ‘도피’와 ‘해방’과 같은 단어로 BL을 규정한 것이 이색적인데, 이 문구를 접하게 되는 순간, ‘억압’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동시에 당대의 거대 담론인 페미니즘도 함께 떠올려진다. 이처럼 비평의 영역에서 BL을 읽는 행위는 억압된 여성 화자의 ‘그 무엇’을 듣는 행위일 테다. BL은 이렇게 읽을 때 이 장르에 숨겨진 의미를 온전히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오랜 시간 BL 여성 화자들이 당당히 발화하지 못하고, 대리자나 가면의 형식으로 소소하고 뜨거운 ‘사랑’ 이야기를 해야만 했던 지난날이 스쳐 지나간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어 가면의 형식으로 이야기되어야만 했던 장르를 남성 평론가가 읽고 쓰는 행위가 무엇인가 낯설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러한 마음을 품고 피너툰에서 연재를 종료 한, 건빵 작가의 BL 웹툰 〈가정부를 부탁해〉(2019)를 읽는다. 3년 전 웹툰이지만, 시간이 오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에게 여전히 읽힌다는 점과 여성의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일로 간주되었던 ‘가정부家政婦’를 소재로 다룬다는 점에서 리뷰 대상으로 선택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가정부’는 가부장제 사회의 한 형태를 보여주는 소재였기 때문에, 이 틈을 어떻게 끌고 가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가정부는 일정한 보수를 받고 집안일을 해 주는 ‘여자’로 인식되지만, 이 웹툰은 이런 틀을 깬다. 반복하자면 사전에 적힌 채 화석처럼 굳어진, “일정한 보수를 받고 집안일을 해 주는 여자”의 역할을 늠름한 남성의 역할로 바꾼다. 착하고 의리 있는 멋진 ‘남성’이 그 역할을 무척 잘해나간다.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도윤은 자신의 비싼 외제차를 손상 입게 한 반찬을 가정부로 고용해 빚을 갚게 한다. 이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 두 주인공은 서로의 내밀한 상처를 알아가게 되고 서로를 믿게 된다. 궁극적으로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가정부를 부탁해〉는 이런 내용을 품고 있다. 생각해 보면 특별한 내용이 아니다.
하지만 이 서사 속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문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 텍스트가 개인이 아닌 보편의 문제를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행위는 ‘나’와 ‘당신’과의 관계이지, 누군가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작가는 이 지점을 비유의 방식으로 문제 삼는다. 대리자의 측면에서는 고정된 성역할을 지향하기보다는 함께 가정을 만들어 나가는 현실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위트 있게 역설한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점이 존재한다. BL이라는 장르 형식을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BL적인 가능성에 해당되는 짓눌린 은유의 형태가 무엇인가 아쉬웠다. 2015년에 개봉한 토드 헤인즈 감독의 〈캐롤〉의 경우, 긴장과 함께 독특한 카메라 시선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는데, 웹툰의 형식을 감안하더라도 무엇인가 이야기가 진행되다 끝난 느낌이다. 그리고 도윤과 반찬이 사랑하게 된 계기가 너무나 급작스럽게 전개되었다. 무엇보다도 그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도 흥미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마스다 미리의 만화 『주말엔 숲으로』(2012)의 한 구절을 읽으면서 이 글을 끝맺으려고 한다. 하야카와는 시골에서 번역 일을 하며 프리랜서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를 만나러 온 도시 친구와 숲길을 함께 걷는다. 친구는 낯선 시골 풍경을 만끽하기 위해 빠른 걸음을 재촉하지만, 하야카와는 이렇게 묻는다. “인간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만 걷는 건 아니다.”라고 말이다. 웹툰의 흐름도 이렇게 흘러갔으면 좋겠다. 우리는 K 웹툰을 위해 만화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내 곁에 있는 우리들의 소중한 결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 잠시 멈춘 채, 좋은 작품에 대해 고민해 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