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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Sep 14. 2022

#비건!


인간은 어디까지 옳은가. ‘인간이 옳다고 굳건히 믿었던 진리가 시대에 따라 늘 항상 흔들렸기 때문에 이 질문은 곤욕스럽다재현의 표정을 품은 소설은 이러한 사실을 어렵지 않게 증명한다최근에 우연히 읽은 옥타비아 버틀러의 이 좋은 예가 될 듯하다이 텍스트는 흑인 노예제도를 SF 형식으로 비판한 소설인데 시대의 한계를 거론한 구절이 인상적이다미래의 시간에 사는 주인공 다나는 과거의 시간에 살고 있는 루퍼스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헌신적으로 그를 도와주지만 그녀는 루퍼스를 믿지 못한다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도움을 받은 사람은 생명을 구해준 사람을 호의적으로 생각해 줄 수밖에 없지만실제로 텍스트에서도 루퍼스는 다나에게 굉장히 호의적이지만우리는 시대’ 앞에서 무조건적인 친절을 감히 바랄 수 없다다나가 노예를 소유하고 거래하고자기 아버지처럼 고약해지진 않겠지만 결국 그 시대 남자야.”라고 평한 것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다나가 흑인이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발언은 다소 섬뜩하게 다가온다당신이 생명의 은인이라 할지라도 시대’ 앞에서는 배려나 선의는 굴절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시대’다. 이처럼 ‘인간’은 시대를 좀처럼 벗어나기 힘들다. 아무리 선하고 착하더라도 그 시대가 요구하는 잣대에 오염된다. ‘시대’는 ‘이데올로기’와 비슷한 ‘무의식’이니 그렇다. 그러니 거부하기 참 힘들다. 당연하고 마땅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시대에서는 그 시대의 ‘잣대’가 허락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때 당시의 합리적인 가치관은 또 다른 시공간에서 얼마든지 수정될 수 있다. 그러니 이곳에서 ‘인간’이 선택하고 정한 법과 사회제도는 항상 옳다고 단정할 수 없다. 과거에 합리적으로 호명되었던 것들도 어렵지 않게 의심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오로지 특정 시대의 사람들만이 옳은 것이라고 동의할 뿐, 그 이상은 기대하기 힘들다. 이러한 맥락에서 ‘포스트-휴먼’은 인간 이후를 다룬다는 점에서, 과거에 조명되었던 ‘인간’을 넘어서고자 하는 운동의 한 형태이자 담론이다. 이 담론 역시 분명히 한계가 존재하겠지만, 이 개념에 붙어 있는 선한 의지는 틈에 놓인 존재를 쳐다보게 한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모여 동물을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다.


데이비드 스몰의 두꺼운 텍스트 『나 혼자』(2021)에서는 잔인하게 동물을 살해하는 어느 한 인물이 등장한다. 이 사건은 텍스트 속 이야기 구조 안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동하지만 이 작품을 분석하는 것은 우리의 목적이 아니니, 눈여겨볼 것은 무슨 사연으로 잔인하게 동물을 살해하는 인물이 버젓이 당대에 등장하느냐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동물’ 자체를 노예처럼 다뤄도 괜찮다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을 해하는 것에는 법적 제약이 따를 뿐만 아니라, 동족으로서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만만한 ‘동물’을 학대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기에 마구잡이로 살해를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동물이 작고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했기에, 궁극적으로 이러한 표정이 ‘살인’의 형태는 아니더라도 동물을 대하는 지금 이곳의 보편적인 모습을 반영해 주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 나는 인간의 범주를 확대해 모든 ‘인간’이 ‘인간’에게만큼은 선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지만, 앞서 논한 것처럼 흑인 노예제도를 소재로 다룬 『킨』의 경우를 떠올릴 때, ‘인간’을 도구처럼 다뤘던 역사를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인간’ 자체에도 큰 기대를 걸 순 없는 것이다. 가깝게는 광기로 점철된 시대에 벌어졌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나치 독일은 1940년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만들어 1945년 1월 27일 소련군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유대인과 폴란드 공산주의자 약 130만 명을 구금, 이 중 110만여 명을 살해했다. 하루에 3,000명씩 독가스로 죽여 화장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우슈비츠엔 집시·소련군 포로·동성애자·정치범 등도 수용되었지만, 희생자의 90%는 유대인이었다.


이처럼 인간은 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을 조직적으로 학살했다. 자기 민족이 우세하다는 잘못된 이데올로기에 휩싸여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인간은 겉으로 보기에 이성적이고 고상해 보이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기록한다. 이곳이 아닌 저곳의 먼 독일을 예로 들었지만 한국전쟁, 제주 4·3, 1980년 광주에서 벌어진 잔인한 학살을 떠올려 보면 먼 나라 이야기도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폭력이 지금 이곳에서도 서슴없이 자행되고 있다. ‘인간’이라는 이유로 인간이 아닌 동물을 무참히 죽이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우리는 동물을 생명체가 아닌 ‘상품’으로 믿고 있기에 잔인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텍스트 해치지 않아(2016)가 학살에 대한 좋은 답변이 될 수 있지 않을까이 텍스트에서 등장하는 수의사 수한은 수의관 시절 구제역이 터졌을 때구덩이에 수백 마리의 가축들을 생매장한 인물이다직접 생매장은 하지 않았더라도말리지 못한 채 저만치 멀리서 지켜본 인물이다그는 이 사건 이후로 지난한 악몽에 시달린다저자는 이 악몽의 현실을 반영이라도 하고 싶었는지 텍스트 제목 자체도 해치지 않아로 정했다더 이상 동물을 해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반영한 것이다더 나아가 수한이 수의사라는 직업 자체가 동물을 보살피는 직업이라는 점에서 그가 가축을 생매장한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이 반어적으로 읽힌다무엇보다도 이 사건이 작가에게 얼마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이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생각해 보면 특정한 동물이 병에 걸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폐사시켰다는 뉴스를 매스컴에서 자주 접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일상이니 그렇다. 하지만 동물 입장에서는 얼토당토아니하다. 이처럼 우리는 ‘동물’ 자체를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존재로 쳐다보지 않는다. 오로지 인간을 위해 필요한 에너지 자원 정도로 여긴다. 편리할 때 주머니에서 빼서 쓸 수 있는 장난감이나 다름없다. 동물은 인간의 쓸모를 위해서만 가치를 인정받는다. 이러한 쓸모를 위해 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의미 없는 죽음을 맞는다. 해양환경단체 시셰퍼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림작가 김한민도 이러한 사실에 분노한다. 그는 프랑스에서 체류할 때 라디오에서 들려온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의 발언을 잊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방송에서 21세기의 ‘홀로코스트’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있나요? 라는 사회자의 대답에 다음과 같이 답변했기 때문이다.


제 생각에는 공장식 축산입니다. 즉, 인류가 공장식 축산에서 동물들을 다루는 방식 말입니다. 미래 인류가 돌아본다면 미친 짓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공장의 부품처럼 동물을 취급한 인류를 향해 일침을 가한 발언이다. 생각해 보면 인간 또한 마찬가지로 노동자로서 자신들 또한 부품처럼 취급되기 싫어 온몸으로 저항한 이력이 있지 않는가. 당대에 쏟아지고 있는 무수히 많은 노동문학이 그것을 증명해 주지 않는가. 더 이상 부품으로 취급받기 싫어, 함께 싸우자고 어깨동무하며 목소리 높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정작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뻔히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곁에 있는 동물을 외면한다. 이러한 사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왜 이런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가. 이유는 특별하지 않다. 상황과 조건도 오로지 ‘인간’을 위해서 모든 것들이 개념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보다 더한 것은 동물 중에서도 종차별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흑인 노예제도처럼 동물들도 계급이 나누어지는 것이다. 반려동물은 가족이지만 대규모 축산 시설에서 힘겹게 삶을 살아내는 동물은 ‘곁’에 있는 ‘동물’로 취급받지 못한다. 같은 동물인데 어떤 동물은 가족이 되고 어떤 동물은 먹이가 된다.


당대의 무수히 많은 텍스트가 특히, 시인들이 자신의 반려동물에 각별한 애정을 쏟아내며 그들의 결을 노래하지만, 대규모로 사육되는 소외된 ‘동물’에 대해서 노래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이들도 자신의 반려 동물에만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니다. 동물을 대하는 이곳의 부조리를 문제 삼는다. 하지만 전적으로 싸움을 청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싸움의 방식이 없다고 할 수 없으나, 이벤트와 같이 일회성에 그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대의 페미니즘 담론처럼 확장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궁극적으로 동물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너무나도 이기적인데, 오로지 자신만을 챙기고 난 다음, 즉. ‘나’가 살 수 있어야 가장자리를 응시하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타자는 중요하지 않다. 우선 제 밥그릇부터 챙긴다. 그러니 가장자리에 놓인 동물의 권리 따위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자신의 밥그릇이 가득 채워지지 않는 한 당신을 챙기지 않는 인간의 습성은 그래서 실망스럽다. 또 다른 이유로, 많은 수의 작가나 정치인이 도시에서 생활한 탓에, 도축장과 같은 대규모 동물 시설에서 자행되는 학대 현장을 묵도하지 못한 것일 수 있다. 그래서 2011년 2월 25일 날짜에 방송된 〈생매장 돼지들의 절규〉의 마지막 5분은 동물사랑실천회의 간절한 부탁으로 끝맺는데 눈여겨봐야 할 영상이다. 이들은 절규한다. “불편한 진실을 담고 있는 이 동영상을 많은 분들이 보실 수 있도록 다른 분들에게 전달해주세요.”, “지금의 육식 산업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 주십시오”라고 말이다. 이런 문구를 접하게 되면 육식을 하는 행위 자체가 부끄러워진다. 생각해 보니 오늘 노랑 통닭을 먹었다.


2011년 12월 4일에 공개된 44분짜리 드라마 〈블랙 미러〉 시리즈 1시즌 1화에서도 ‘동물’이 등장한다. 이 동물은 돼지다. 어느 한 테러리스트가 “총리가 돼지와 수간(獸姦) 하지 않으면, 공주는 죽는다”는 다소 기이하고 충격적인 조건을 내걸고 국민을 대상으로 협박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협박에 못 이겨 총리는 돼지와 수간을 하게 되고, 공주 수잔나는 무사히 풀려난다. 이야기로 따지자면 아무것도 문제 될 것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돼지와 수간한 총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혐오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특히 총리의 아내는 그를 더 이상 ‘인간’으로 쳐다보지 못한다.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혹독한 희생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총리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외면 받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동물과 인간이 다르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뻘뻘 땀 흘리며 돼지와 수간한 총리를 더 이상 동일한 인간으로 응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극단적인 연출이지만 ‘인간’과 ‘동물’의 위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돼지와 공주〉는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 준다. 따라서 먼 미래에 우리가 도달한다고 하더라도 ‘동물’은 ‘인간’과 대등한 대우를 받진 못할 것이다. 가능할 수 있다면 판타지에서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은 원점으로 돌아온다. ‘인간’은 특별한 존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렵지 않다. 인간은 특별한 존재일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은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사회를 확장한다는 점에서 그 어떤 종보다 뛰어나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우리는 나무 물고기 숲 새 곤충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인간의 생은 무한한 것이 아니라 언젠가 한 번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후속 세대들에게 이곳의 결을 물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물려준다는 표현이 무엇인가 권위적으로 들릴 수 있겠다.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잠시 빌려 쓰고 떠나는 존재이니 훼손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인간’은 우리 곁에 있는 대상에게 함부로 행위를 하면 안 된다. ‘인간’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곁에서 이들을 챙기며 살아가야 한다. 이것은 하나의 의무다. 그런데 이 문장을 쓰면서 왜 이렇게 부끄러운 것일까. 인디언의 격언을 읽어 본다. “인간으로 태어남은 성스러운 신임을 받은 것이다. 이 특별한 은혜에는 신성한 책임이 있다. 나무, 물고기, 숲, 새 지구상의 모든 살아 있는 존재가 받은 은혜를 뛰어넘는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그들을 돌볼 의무가 있다.” 그렇다. 이 격언을 종이에 받아 적으며 나의 ‘의무’에 대해 생각해 본다.


골방에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면 먹고 싸고 하는 것을 리얼하게 느낄 수 있다. 아침에도 먹고 점심에도 먹고 저녁에도 먹는다. 그런데 이 몸이 참 신기하다. 먹은 것을 있는 그대로 밖으로 배출한다. 이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다 보면 내 몸이 작은 기계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원인’과 ‘결과’도 수학처럼 정확하게 떨어지니 내 몸은 마법 상자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먹은 것이 변형되어서 그대로 나오니 더더욱 그렇다. 신기하지 않은가. 재료를 넣으면 새로운 물질로 나온다는 사실이 말이다. 며칠 전에는 오랜 만에 이곳에 찾아온 누나가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휴지통에서 이상한 악취가 난다고 꾸짖었다. 대체 요즘 무엇을 먹고살기에 악취가 나느냐는 것이다. 나는 잘 알고 있다. 이 악취는 좁은 우리에서 살아야만 했던 동물의 영혼일 것이다.


그때 번뜩 생각나는 것이 조선시대 임금이 눈 똥 냄새를 신하들이 맡아가면서 건강을 체크했다는 일화가 떠올랐다. 더불어 내가 먹은 음식이 온전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제는 돈가스를 먹었고, 저녁에는 토실토실한 소시지를 야식으로 구워 먹었다. 과자도 종종 뱃속에 두둑하게 챙겨 넣었으니 좋을 리 없다. 나는 음식飮食이라고 적었지만, 이 음식 재료는 돼지다. 이들은 모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내 몸속에 들어오기 전, 고통을 느끼며 죽었을 것이다. 내가 어제 먹은 돼지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2018)에서 등장하는 슈퍼돼지처럼 인간을 위해 희생된 존재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렇게 동물과 관련된 글을 쓰면서 여러 텍스트를 찾아보았고 좌담을 하며 동물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잠시 후 정작 내가 먹고 있는 동물에 대해서는 배려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과 관련된 다양한 소설집과 시집 그리고 그래픽 노블, 웹툰 등의 결이 다른 동시대 텍스트들이 어떤 방식이든지 당대의 ‘동물’에 대해 논하며 지금 보다는 더 나은 사회를 향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작 비평은 그 작품에 대해 당위적인 이야기밖에 할 수 없을 뿐, 더 나아갈 수 없다. 평론가들은 ‘차이’를 운운하며 텍스트의 장단점을 논리적이고 감각적인 언어로 나불대지만, 동물을 위한 진보를 논하는 과정이 이런 방식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어떤 방식이든 ‘비건’이 되어보는 것이다.


처음이라서 많이 서툴겠지만 이 방법만이 우리가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이 될 수 있다. 최근에 마일로의 『크레이지 가드너』(2022)를 읽으며 인간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해 본다. 내가 잠시 멈추었던 구절은 “코로나19이후 10대와 20대 가드너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 텍스트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는지 모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전염병으로 인해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이유로 식물을 돌보는 사람들이 증가했다는 사실이 무엇인가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물을 향한 이러한 시선은 자연스럽게 ‘동물’에게도 향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인간과의 관계가 소월 해졌기 때문에 결국에는 ‘동물’을 넘어 ‘식물’에게까지 관심을 품게 된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관계가 형성되니 타자가 아닌 피부의 결로 인식된 것이다. 그렇다면 전염병이야말로 인간에게 해가 된 것이 아니라, 유익한 병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본다.


그러나 팬데믹 상황이 물러나면 인간은 또다시 이들을 밀어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동물 관련 텍스트를 소개하거나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을 지키기 위해 작은 ‘실천’을 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나의 마음을 주변에 조금씩 알려보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은 낯설겠지만 오늘부터 비건을 지향해 보고자 한다. 비건을 지향하면서 곁에서 나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에 대해 귀를 기울여 보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결론은 다음과 같다. #비건!■


1) 옥타비아 버틀(각색 데이미언 더피, 그림 존 제닝스), 『킨: 그래픽 노블』, 박설영, 프시케의숲, 2022, 213쪽.

2) 세계문화사전

3) 정미진, 싹이돋아, 『해치지 않아』, atnoon books, 2016, 91쪽.

4) 김한민, 『아무튼, 비건』, 위고, 2018, 55쪽.

5) 한겨레 TV https://www.youtube.com/watch?v=MwwPgoz-V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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