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프와드-고도 3954』(2021)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2013)의 원작자인 장 마르크 로셰트의 그래픽 노블 『엘프와드』(2021)가 최근에 번역되었다. 이 텍스트는 산악가이드의 꿈을 품은 채 멋진 동료와 높은 산을 오르며 겪게 되는 에피소드를 담았다. 그런데 이 책은 단지 산악인이나 산을 위한 만화가 아니다. 무슨 이유로 산을 오르는지에 대해 답하는 텍스트도 아니다. 산을 오르는 이유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해 묘사하지만, 그보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장 마르크 로셰트가 만화가로 성장하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이 책은 어느 한 예술가의 ‘작가탄생’ 서사가 스며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하지만 이러한 판단은 자전적인 형식을 지닌 그래픽 노블이라는 점에서 사후성을 감안해야 한다. 시간의 끝에서 서술되는 형식이니 이렇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로셰트가 하산하는 과정에서 떨어지는 낙석(落石)을 피했더라면 어땠을까. 턱이 떨어져 나가고 혀가 잘리는 부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훌륭한 산악가이드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함께 바위 하던 친구 자르타가 마들렌 고개에서 난 눈사태로 목숨을 잃지 않았더라면 순조롭게 산악가이드가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현실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만약’이라는 과정은 낭만적으로 펼쳐지지 않는다. 로셰트는 결국, 크게 다치게 되었고 자신과 함께 산을 오르던 동료는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어쩌면 이러한 상실이 그를 만화가로 이끌었는지 모른다. “내가 산과 사랑에 빠진 날. 그건 지극한 아름다운 그 자체였다”고 말한 로셰트는 이제 더 이상 산을 오르기 힘들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그는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에 새로운 아름다움을 채워 넣기 시작한다. 그에게 그것은 만화였다. 산을 오르는 장면들과 마찬가지로 독자들은 이 지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이 행위는 마법처럼 한순간에 채워진 것이 아니다. 로셰트가 산악을 위해 모든 것을 거는 과정에서 만화가로서의 가능성도 오래도록 품고 있었기 때문에 이뤄질 수 있었다.
이 텍스트에서 흥미로운 것은 만화가의 시론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시론이라는 말이 다소 어렵게 느껴진다면 만화를 그리는 작가의 취향이나 성향 정도로 이해해도 좋다. 로셰트는 학창 시절에 네덜란드 화가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을 상찬하는 선생의 입장에 반기를 들었다. 보편적이고 순수한 예술을 지향하는 그와 달리 로셰트는 사소한 것을 그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소한 것은 독자들도 짐작할 수 있듯이 ‘만화’다. 하지만 선생의 입장에서는 ‘낙서’나 수작에 불과한 ‘짓’이다. 좀 더 사실적으로 적자면 “너 네가 예술가 같지? 네가 하는 짓은 그냥 낙서야, 낙서”라는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는 편견에 점철된 표정이다. 동시대에서도 만화는 여전히 수준 낮은 텍스트로 취급받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 지점은 흥미롭다.
하지만 로셰트는 선생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만약, 그가 고분고분하게 선생의 말을 모범생처럼 따랐다면 그는 훌륭한 만화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고, 자신의 나라에서만 소비되는 작품이 아닌 세계적인 만화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높은 산을 아무나 오를 수 없다는 편견에 맞서 용기를 낸 사람이며 불변의 진리로 단정 짓는 미술사의 객관성을 의심했던 사람이다. 그러니 자신을 속박했던 기존의 고정화된 예술에도 당당히 반기를 들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텍스트는 ‘산’과 ‘예술’이라는 다소 이질적인 요소를 동시에 다룬다. 작가탄생 서사가 상투적으로 구성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독자들은 흥미롭게 이 만화를 접해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