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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Sep 21. 2022

사적인 이야기

부축의 시론에 대한 몽상





사적인 이야기부축의 시론에 대한 몽상


“두규형, 나도 그렇게 누군가를 부축해 줄 수 있을까요?”


박일환 선생님을 두 번 뵌 적이 있다. 한 번은 4년 전 어느 한 문학 행사 뒤풀이 장소였다. 정확히 말해 뒤풀이가 모두 끝나 나뭇잎처럼 흩어지는 과정에서 아쉬운 사람끼리 맥주 한 잔 더 하게 된 것이다. 그때 작은 테이블에는 황경란 소설가와 이재용 평론가도 함께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글 쓰는 행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지는 이렇다. 글이 안 될 때는 쓰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이다. 억지로 쓰게 될 경우, 자신의 문학을 망칠 수도 있으니 소신 있게 인정 욕망을 덜어내고 새로운 것을 채워 나갈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신 것이다. 당시에는 이 말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떤 말인지 온전히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쓰는 행위는 결국, 한정된 몸을 소비하는 것이니 습관적으로 쏟아내다 보면 어느 순간 동이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는 항상 새로운 것을 채우고 있으니 계속해서 창조적인 무엇인가를 생산해 내겠지만, 쏟아지는 수많은 신간 서적을 성실히 따라가며 읽고 쓰는 행위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무작정 좋다며 넙죽 청탁받기보다는 마음과 호흡을 가다듬은 후, 몸이 준비될 때 청탁받는 것이 양심을 지킬 수 있는 하나의 방법임을 선생님은 그때 알려주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의 이 말을 오래도록 잊지 않는다. 그다음은 박영근 문학상 시상식 뒤풀이 자리였다. 선생님과 우연히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떤 조직이나 문학단체에 오래도록 머물기보다는 홀로 설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다. 누군가가 오래도록 한곳에 오래 머무르게 되면 조직이 나태해질 수 있음을 우려하신 것이다. 그 단체가 늘 항상 긴장을 유지할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음을 이야기하신 것이다. 나태를 극복하는 방법은 각자 다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대부분의 조직은 흔들리게 된다는 점을 덧붙여 주신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때 자신의 문학을 믿으며 독립적으로 홀로서기보다는 잡지 편집위원이나 문학단체에 의지하며 문단 생활을 이어나가는 작가들을 향한 냉정한 비판으로 받아들였다. 나 또한 예외일 수 없어서 오랜 시간 진지하게 몽상했다. 선생님의 이러한 언급은 여러 선배들이 책 속에서 늘 항상 해오던 말이어서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현역의 목소리로 직접 들으니 좀 더 리얼하게 다가왔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당당히 말하는 시인이 곁에 있다는 게 반가웠다.


박일환 선생님과의 이런 사적인 이야기를 적는 이유는 그의 문학이 정직하고 우직한 언덕 위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누군가는 그의 언어와 형식이 밋밋하다며 투정을 부릴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학교 선생님으로서 학생들의 이야기를 감칠맛 나게 담은 청소년 시집과 “핑그르르/ 떨어져 내려/ 도토리를 덮어 주던/ 도토리나무 잎새처럼”(「가을」) 포근한 동시집 그리고 첫 시집의 경우는 달랐지만, 그가 출판한 시집을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무엇인가 생동감 있고 기발한 ‘현장’의 사건을 기대했지만 아쉬웠던 것 같다. 무슨 사연으로 이런 마음을 가졌는지 생각해 보니 그것은 아무래도 ‘당사자성’과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된다. 가령, 노동의 모습을 그리는 과정에서 현장을 지켜보는 자와 현장 안에서 목숨을 거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노동자 “무리들 속에/ 시인”도 함께 했음을 부정할 수 없지만, 풍경을 쳐다보는 것과 풍경 속에서 거친 흙을 딛고 현실을 버티는 것은 결이 다르다. 몸이 외부에 있으면 무엇인가 흔들린다. 시인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직업이 선생인 자신과 노동자와의 거리 감각으로 인해 “자판 위의 글자들이 길을 잃고 허둥”(「잔인한 희망1」) 댔던 경험을 시로 옮겨 놓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가 가르쳐준 잣대로 ‘나’와 ‘그’를 쳐다본다면 전폭적인 호평은 하기 힘들다. 그러나 박일환 시인은 정직하고 선한 눈을 지녔다. 그 눈으로 세상을 쳐다본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예술을 끌고 나간다. 시인은 성실한 체력과 곧은 습관을 무장한 채, 이곳에 놓인 다양한 틈을 언어의 조탁이 아닌 정직한 시선으로 정말로 부지런히 노래한다.


앞서 시 형식에서 논의되는 ‘세련’을 강조했지만 모든 문인이 ‘세련’을 향해 자신의 목을 내건다면 무엇인가 부담스럽다. 그러니 작고 소외된 존재에게 눈길을 보내는 선한 시인의 시선이 오히려 더 귀중하다. 따라서 우리는 그에게 함부로 침을 뱉을 수 없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문화와 문학의 다양성이고 자신의 표정을 숨기지 않는 것이다. 모든 문인이 같은 주제로, 같은 담론에 맹목적으로 매달려 좇아가는 것은 괴기스러울 뿐만 아니라 섬뜩하다. 이 시대가 좇고자 하는 것이 아무리 첨단이라 할지라도, 몰려다니면 ‘멋’ 있게 보이지 않는다. ‘멋’은 개별적이고 독특한 몽상에서 시작되는 살갗이니 말이다. 이러한 가능성마저 거대 담론이나 쏠림 현상에 의해 희석된다면 문학은 해서 무엇하겠는가. 어차피 새로운 길이 아닌 정해진 유행의 길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것을 갈구한다. 시 읽는 즐거움이 존재한다면 즐거움은 배가 되니 이러한 요구는 당연하다. 형식에 신경을 쓰는 것이 누군가는 소외된 타자를 외면하는 것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조던 필 감독의 『겟 아웃』(2017)이나 에리크 스베토프트의 『SPA』(2022)처럼 타자를 품는 방식이 흥미롭다면 독자들은 더욱더 대상을 온전히 응시하려고 한다. 낯선 사진이 오래 더 기억에 남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형식’은 그래서 굉장히 중요하다. 하지만 시인 박일환은 이 방법보다는 소외된 타자 곁을 지키려는 일관된 문제의식을 품은 채 당대의 부조리를 투명한 형식으로 노래한다. 시대 담론을 중심으로 ‘나’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짓눌린 당신을 중심에 놓고 시대 담론을 운영해 나간다. 그것이 시인의 스타일이다.


그는 ‘사람’을 교환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지폐처럼 대신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지도 않는다. 독특한 향기를 품은 존재로 당신을 지긋이 바라본다. 그에게 당신은 못나도 사람이고 위대해도 사람이다. 우리는 “70억이 넘는 지구인 중에 하나”(「거룩한 한 알」)다. 학생들이 똑같은 주제로 그림을 그릴 때, 모두 다르게 그림을 그리는 것도 “틀린 그림이 아니라 다른 그림”(「틀린 그림 찾기)이다. 시인의 이러한 시선은 자연스럽게 한 사람의 삶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것으로 확장된다. 그러니 그가 소외된 노동의 문제에 관심을 갖거나 소외된 동물이나 타자들에게 눈길을 보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처럼 그가 보기에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머리털」)은 없다. 각자 자신의 결과 피부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잘 알려지지 않는 존재들에게 눈길을 보낸다. 그는 잊혀진 보석을 발견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여성들에게 금기시된 여행을 단행하여 제천 의림지, 금강산, 관동팔경, 설악산, 서울을 유람”한 당찬 소녀 “김금원”(「어떤 열네 살」)을 기억하고자 했던 것도 이런 이유다.


하지만 같은 사람이 없다는 말은 어떻게 생각해 보면 참 우울한 말이기도 하다. 같은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차별받고 누군가는 소외당하고 누군가는 무시당하며 외면받는 것이 이곳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말처럼 주변 사람들이 같은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 시는 쓰일 일이 없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기에 시는 쓰이고 독자들은 그 시를 읽는다. 그래서 시인은 이러한 틈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주시한다. 그렇다면 시인은 어떤 마음으로 이런 존재들에게 손을 뻗은 것일까. 시인이 뻗은 손의 방향을 확인해 보면 그가 지향하는 문학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만질 수 있지 않을까.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첫 시집에 수록된 첫 번째 작품에서 그는 큰 다짐을 한다. “동백꽃 물고 죽은/ 그 옛날의 나를 만날 때까지”(「서시」) 이곳에 서 있겠다는 결의가 그것이다. 여기서 결의란 사후적인 맥락에서 그가 걸어간 흔적을 통해 유추해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그것은 아마도 해맑고 순수할 뿐만 아니라 불의를 보면 물러서지 않는 정신일 것이다. 즉, 뒤로 물러서지 않은 당당한 ‘나’와 조우하는 것이라고 믿어 본다. 이 순간을 위해 시인은 오랜 시간 자신의 시작詩作을 지금까지 해오고 있다.


결의나 다짐은 시에서 바람을 낳기도 한다. 바람은 자신의 시에 대한 방향과 무관하지 않다. 시인은 가랑비와 싸락눈이 지상의 존재들과 만나는 순간을 떠올리며 “가랑비는 가랑가랑 내려 당신의 야윈 발목을 적시고/ 싸락눈은 싸락싸락 내려 지친 내 어깨를 토닥”(「가랑비는」) 거린다고 적었다. 시인의 이러한 시선은 자신 또한 누군가의 어깨를 포근히 끌어안으며 야윈 발목과 지친 어깨를 토닥여 주고 싶은 바람을 적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새들이 찾아들면 기꺼이 한 자리 내주는”(「소망」) 나무를 닮고 싶어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싶지 않다. 무엇보다도 그는 소외된 존재들을 시집의 형태로 세상에 알리려고 노력하지만 이 행위는 만만치 않다. “저 푸른 감옥에 갇혀/ 뻐꾸기의 피울음 같은/ 옥중시 한 편/ 바깥 세상으로 내보내고”(「숲」) 싶어도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마음으로는 무엇을 하지 못하겠는가. 하루 아침에 만리장성도 쌓아 올릴 수 있는 것이 마음의 힘이지만, 현실은 마음을 대변해 주지 못한다.


시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아직 시 속에 들어오지 못한 “가여운 벌레들의 울음소리”(「시의 바깥을 거닐다」)를 귀담아듣고 자신의 시집 속에 담아내려고 애쓴다. 그들의 서글픈 사연을 언어의 힘을 빌려 독자들에게 알리려고 한다. 무엇보다도 개별적인 존재들의 소소한 사연들까지도 곁에서 호흡하며 만지기 위해 애쓴다. 박일환의 문학에서 가장 큰 미덕은 이처럼 작거나 소외된 존재들에게 눈길을 보내는 따뜻하고 선한 마음일 것이다. 이 시선에는 불순한 존재들이 달라붙지 않는다. 의도가 사리진 의도의 의도를 품는다. 누군가는 박일환의 작품을 지나치게 투박하다고 비판할 수 있지만, 그는 곁에 있는 소외된 이웃의 사연을 노래한다. 이런 선한 시선 앞에 비판은 불가능하다. 그가 변하지 않은 한, 곁에서 지켜봐 주는 것이 옳다.




왼쪽 꼭지를 돌리면 찬물이

오른쪽 꼭지를 비틀면 더운물이 나옵니다

은총처럼 쏟아져 내립니다


물동이 이고 고샅길 접어들다

돌부리에 채여 넘어진 어머니

깨진 무르팍보다 물동이 먼저 걱정하셨는데


파란색 꼭지를 돌리면 찬물이

붉은색 꼭지를 비틀면 더운물이 나옵니다

밤낮없이 쏟아져 내립니다


-젊으셨을 적 개울가에서 빨래하다

부르튼 어머니의 손

그 위에 맨소래담 한번 바르지 못하셨는데


수도꼭지에 샤워기까지 달아

우리 식구 목욕탕 한번 가지 않고

겨울을 날 때, 어머니

당신의 젖꼭지에선 더 이상 샘물이 솟지 않는군요

왼쪽 샘도 오른쪽 샘도 모두 말라버렸군요


오 어머니

그렁그렁 눈물샘만 여전하시군요


                                              샘[泉] 전문




시인의 시편 중에 ‘어머니’에 대해 쓴 시 몇 편이 있다. 그중 이 작품은 다소 길게 느껴지지만, 전문을 인용해 보기로 할 텐데, 나는 이 부분이 박일환 문학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시인은 어머니를 회상한다. 엄마는 어느 날 물동이를 이고 고샅길 걸어가시다가 돌부리에 넘어져 무릎이 깨졌다. 하지만 다친 무릎보다는 살림 걱정을 하신다. 젊으셨을 적에는 추운 겨울날 개울가에서 가족들을 위해 손빨래를 직접 하시기도 했다. 차가운 바람과 찬물로 인해 손이 부르텄다. 하지만 엄마는 맨소래담 한 번 제대로 발라 보지 못했다. 엄마는 그렇게 삶을 살았다. 자신을 지독하게 희생하며 세상을 버텼다. 그런 엄마의 지난날을 잘 알고 있는 시인은 현재 작은 아파트에서 사는 것이 부끄럽다. 아파트는 오른쪽으로 꼭지를 비틀기만 하면 더운물이 콸콸 쏟아지기 때문이다. 화자는 어머니의 희생으로 내가 이곳에 살 수 있게 된 것은 아닌지 고개를 들 수 없다. 이러한 감정은 어쩌면 영원히 씻기지 않는 ‘죄’의 한 형태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리 용서를 구해도 용서받지 못하는 상황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시인의 이러한 개인적인 사연과 시선이 궁극적으로 소외된 자들에게 옮겨지고 있다는 데 있다. 소외된 ‘노동’ 현장에 관심을 갖거나 학교에서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친구들에게 함박웃음을 지어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즉, 그는 ‘엄마’와 같은 존재들을 품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노동자들의 뒷모습도 마찬가지다.


당대의 노동은 과거와는 분명히 다르지만, 여전히 먹고사는 문제는 소중하니 이 시대의 핵심 과제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니 시인은 기본적인 욕구마저도 채울 수 없는 존재들의 곁에 서서 그들의 목소리를 시집에 옮겨 담는다. 가령, “공장에서 쫓겨난/ 기륭전자 여성 노동자들”(「돌담에 매달린 꽃」)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지고, 잡담을 했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해고”(「잡담」)된 노동자의 사연에 귀를 기울인다. “천 일 넘게 농성을 하고 있는 노동자”(「잔인한 희망1」)를 보며 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어쩔 줄 몰라하기도 하고, 신문지를 뒤집어쓴 채 지하철 대합실 구석배기에서 잠을 청하는 “누군가”(「겨운 목숨」)의 주변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렇다면 시인은 이러한 광경을 쳐다보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데올로기는 나를 사랑하는 대신 체제를 사랑하라고 선동한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강력한 반동은 나부터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내가 애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어야 하고

애인이 나를 따라오는 것도 아니어야 한다

나와 애인의 얼굴을 하나로 몽뚱그리려는 체제와 이데올로기는 사랑을 모른다

체제와 이데올로기가 쳐놓은 막을 찢어버린 자리에서 사랑은 시작되고

그 길 끝에서 자유가 기다리고 있다


                            「사랑이 시작되는 자리」 부분





이데올로기는 무의식과 동일하다. 이데올로기가 팽배한 곳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시대를 벗어나기 힘들다. 흙인 노예제도를 비판한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은 그것을 증명해 준다. 또한, 당대의 논쟁적인 여러 개념을 온전히 쳐다보기 위해 우리 모두 힘내보지만, 그 방법이 항상 옳다고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부조리나 잘못된 표정에 대해 말하는 것을 멈추면 안 된다. 말하는 과정에서 서로 부딪치며 상처를 입을지라도 옳은 것과 덜 옳은 것을, 명확한 것과 덜 명확한 것을, 인정해야 할 것과 덜 인정해야 할 것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 시인의 말처럼 “체제와 이데올로기가 쳐놓은 막을” 찢어 새로운 길로 함께 걸어가야 한다. 찢는다는 표현이 다소 과격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간절하다는 말로 읽어도 무방하다.


박일환 시인은 이처럼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체제와 싸운다. 틈에 놓인 작은 존재들을 지키기 위해 싸움을 청한다. 그가 할 수 있는 그만의 방식으로 링에 올라선다. 아니다. 싸움을 한다기 보다도 누군가를 부축해 줄 수 있는 의미 있는 동료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의 문학은 이처럼 곁에서 함께 걷는 시론의 형태로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그래서 ‘부축’의 힘이 그의 문학의 핵심이며 이 힘으로 낡은 몸을 밀고 밀며 자신의 문학을 완성해 나간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시집으로 동화로 동시로 인문학 서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해 이 작업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골방에서 이 글을 쓰며 대나무같이 곧은 선생님의 긴 싸움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다. 더불어 그와 함께 싸웠던, 지금도 함께 싸우고 있는 많은 동료들에게도 싸움의 끈을 놓지 말자고 당부하고 싶다. 이 글을 끝마칠 때 즈음 오랜 시간 자의식 과잉에 빠져 주변을 돌보지 못했던 부끄러운 지난날을 회상한다. 나야말로 글쓰기를 잠시 멈추고 주변과 이웃을 더 많이 만나고 사랑해야겠다. 사랑을 통해 너와 나를 잇고 그들 곁에서 서로를 챙겨 주어야겠다. 궁극적으로 박일환의 시론처럼 누군가를 부축해 주자.■


*


박일환, 「소금꽃 편지」, 『지는 싸움』, 애지, 2013, 55쪽. 이 각주 이후 별도의 각주 표기 없이 이 글에서는 ‘“인용 시”(「시 제목」)’의 형식으로 적는다. 박일환 시인의 시집 중 아래의 작품을 참고했다. 내일을 여는 책에서 2001년에 출간된 『푸른 삼각뿔』에서는 「서시」 「가랑비는」 「소망」 「숲」 「샘[泉]」을, 2008년 삶의 시선에서 출간된 『끊어진 현』에서는 「돌담에 매달린 꽃」 「잡담」 「겨운 목숨」을, 2013년 애지 시선에서 출간된 『지는 싸움』에서는 「소금꽃 편지」 「잔인한 희망1」을, 2019년 반걸음에서 출간된 『등 뒤의 시간』에서는 「시의 바깥을 거닐다」 「사랑이 시작되는 자리」를, 2013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된 동시집 『엄마한테 빗자루로 맞은 날』에서는 「가을」을, 2015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된 청소년 시선 『의자를 신고 달리는』에서는 「머리털」을, 2019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된 청소년 시선 『만렙을 찍을 때까지』에서는 「거룩한 한 알」 「틀린 그림 찾기」 「어떤 열네 살」을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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