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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Nov 05. 2022

아가미 없는 물고기

손은주 시인의 표정에 대해 







                   아가미 없는 물고기







고열에 시달린 어깻죽지 너머 스무 살이 날개를 접었다 펴요

몸부림은 단단해진 여자의 잎일 거예요

뒤쪽의 상처는 젖은 나비의 옷을 말리고 사라져요

(「붉은점모시나비」에서)





기 아가미로 호흡하는 사람이 있다. 물속이 아닌 육지에서 아가미로 힘겹게 헐떡거리며 이곳과 저곳을 돌아다니는 시인이 있다. 그러니 이곳에서 온전한 삶을 살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바다가 아닌 육지에서 생을 마감하는 무수히 많은 물고기를 쓰다듬었던 사람은 안다. 피 흘리고 목이 날아가고 꼬리 잘린 채, 사람들에게 송곳니로 어금니로 오래도록 찍히고 짓이긴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의 삶도 이러한 표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랜 시간 짓눌린 상태로 생을 겨우 끌고 왔다. 이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겨우’다. 손은주 시인은 겨우, 겨우, 삶을 어깨에 짊어 쥐고 다녔다.


핍에서 피어오르는 구체적인 장르가 시라는 점에서 결핍이 없는 시인이 없기에 ‘겨우’의 삶은 특별하진 않다. 물론 예외도 있지만 자신의 삶과 인생이 고통스럽다고 손쉽게 고백하는 사람만큼 편하게 삶을 잘 살아낸 자는 없다. 고통이 고통스럽다면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너무나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시인에게 있어서 고통은 중요할 수 있으나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인에게 미덕이 존재한다면 고통을 어떻게 구체적인 생활언어로 재현하느냐이고 찰나의 시적인 순간을 자신의 주머니 속에 어떻게 잘 품을 수 있느냐이다. 다시 말해 언어를 얼마만큼 경제적으로 운용하느냐이다. 이 지점이 시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기서 당신은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발언에 귀를 기울이겠지만 이 문장도 잘못되었다. 시인에게 있어서 언어를 잘 재현하는 것만이 정답이 아님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때론 언어 못지않게 삶에서 발견되는 사건 자체가 더 값질 수 있다. 잘 써낸 시보다 투박한 언어가 훨씬 더 매력적인 표정을 담아내는 것처럼 말이다. 아니다 이 말도 수정되어야 한다. 투박한 것이 더 세련된 것일 수 있다. 그것은 현실이 언어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시적인 언어가 상상의 영역에 많은 빚을 지고 있지만, 상상의 뿌리를 받쳐주는 지독한 현실이 버티고 서 있지 않다면 시는 손쉽게 무너진다. 그래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창작자들은 새로운 사건(현실)에 목말라한다. 사막 위를 행진하면서 한 모금의 달콤한 물을 원한다.


군가는 거시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사건을 찾는다. 하지만 소소하고 사소한 삶에서도 사건은 얼마든지 일어난다. 시인이 품은 성향이나 감각에 따라 사건은 각자 다르게 적히고 읽힌다. 그러니 사건은 오히려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다. 저 멀리 있지 않다. 시대의 공감과 아픔도 세계사적인 상처도 동시에 끌어안아야 하는 것이 시인이겠지만, 이것은 시인이 품은 그릇 안에서 운용된다. 당신의 그릇이 아니라면 굳이 따라갈 필요가 없다. 그러니 그릇의 크기를 잘 아는 것도 시인이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 고통스러운 습관의 영역도 중요하지만, 역으로 당신의 형편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당신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로 번질 수 있으니 그렇다. ‘나’를 진지하게 파고든다면 나의 이야기는 세계와 만난다. 따라서 우리는 나의 재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역량을 비판적으로 응시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갈고 닦을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손은주 시인은 자신을 어떻게 그려 놓았을까. 자신의 결핍을 어떻게 재현하고 있는 것일까.


신은 “아가미가 없는 물의 숨으로/ 물갈퀴처럼 휘어진 손마디에 거꾸로 매달린 중력”(⌜약속⌟)을 견딘다. 당신은 물속에 있다. 물속에 있는데 아가미가 없다. 숨을 쉴 수 없다. 숨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수면 위로 오르지 않으면 당신은 소멸한다. 고통스러운 꿈이 반복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동일한 감각으로 고통은 반복된다. 하지만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당신이 홍게의 “마지막 몸부림”(「붉은 크리스마스섬」)에 눈길을 보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당신은 잘 살아내고 싶다. 하지만 아가미를 잃어버린 채, “거꾸로 매달린 중력을” 견뎌야 한다. 이 이미지를 어떻게 느껴야 할까. 당혹스럽다. 하지만 이 당혹스러움을 셈하는 순간 당혹감은 물러난다. 당신은 이러한 상황에서 주저하지 않고 일어서기 때문이다. 방법은 이렇다.



“언 땅 위 곁가지로 자란” 초록을 보면서,


힘센 “돛새치”가 물속이 아닌 물 밖으로 힘차게 솟아 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물비늘 털고 움츠린 날갯죽지”가 펴지는 장면을 보면서,


10년 이상을 수행해야 꽃필 수 있는 식물의 “견딤”을 지켜보면서,



롭게 일어나려고 애쓴다. 당신은 결승선을 향해 달릴 준비가 된 단거리 선수처럼 이 순간만을 벼르고 있다. “한 번의 턴”을 응시하면서 힘껏 몸을 밀며 차오를 준비가 된 것이다. 그 순간은 다가왔고 당신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새롭게 태어날 준비가 되었다. 시인은 이 과정을 여러 이미지와 함께 곁들어 놓았다. 무엇보다도 이런 내용이 담긴 작품이 당신의 첫 시집 『애인을 공짜로 버리는 법』에 수록된 첫 번째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무엇보다도 제목이 ⌜약속⌟이라는 점에서 시인은 이제 그런 삶을 살아낼 준비가 된 것처럼, 독자들에게 선포한다. 무엇보다도 당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고 있다는 점에서 아가미 없는 물속에서의 삶은 이제 더 이상 진행되지는 않을 듯하다. 즉, 시집 마지막 작품에서 “새로운 챕터가 열려요”(「챕터는 여기서부터」)라고 마침표를 찍은 것은 장난 섞인 발언이 아니다.


젠가 또다시 아가미 없는 물속에서의 삶이 재현된다면 그것 역시 너무나 강력하기에 적힐 수밖에 없을 테지만 이제는 더 이상 당신에게 그때의 결이 사건의 형태로 다가오진 못할 것이다. 사후적인 발언일 수 있겠으나 이 흔적이 현재 진행형이라면 보다 핍진하게 시적인 언어가 구현되겠지만 우리는 잊히지 않는 표정을 주워 담는 것이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도 잘 안다. 다시 말해 떨어트리려고 애써도 붙어 있는 기억을 언어로 옮기는 일이 당신이 할 수 있는 순수하고 유일한 행위일 테다. 눌린 것은 다른 형태로 무럭무럭 자란다. 표현한다는 측면에서 잊히지 않는 감정을 품은 것은 반복을 통해 리듬을 만드는 것과 다름없다. 눌린 것은 기괴한 모습으로 자라 은유를 왜곡시키지만 이러한 변주는 아름다움을 품는다.


신과 엄마의 사연을 담은 「붉은점모시나비」를 읽으며 여러 지점에서 멈추게 된다. “가면 쓴 여자” “고장 난 엄마의 시계” “탈출” “고장 난 심장” “생리” “스무 살” 등의 시어는 그녀가 걸어간 삶의 궤적을 짐작하게 해 준다. 엄마는 온전한 삶을 살아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고 자연스럽게 엄마의 딸 또한 유년의 그림자가 짙었음을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구체적인 이유가 적혀 있지 않으나,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대한 상처로 짐작된다. 물론, 이 상처도 언젠가는 용서로 바뀌지만, 이것은 어쩌면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행위였으니 시인에겐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상처가 쉽게 용서된다면 그것이 용서겠는가. 쉬운 용서는 용서가 아니다. “술 취한 남자의 표적은 아내와 딸”(「하얀 천국」)이라는 시인의 고백이 그 상황을 증명해 준다. 술 취한 남자를 붙들기 위해 엄마와 딸은 절박하게 신을 찾았다. 없는 신을 향해 무릎 꿇고 간절히 무엇인가를 빌어야 했다. “하나님, 목사님은 보이질 않네”라는 구절이 이런 상황을 뒷받침해준다. “그 병들 인정하기”까지 시인은 많은 시간을 젖은 가슴에 쌓아야 했다.


자는 늘 소외되었으니까. 여자는 자신의 이름을 품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이름을 품는다는 것은 나의 얼굴을 당당히 내밀어 자신을 증명하는 것일 진데, 그럴 수 없었으니까. 당신의 고장 난 심장처럼 엄마도 고장 나 버렸다. 엄마의 고장 난 심장처럼 당신의 심장도 얼어 버렸다. 그렇다. 엄마가 고장 난 것은 신체적인 쓰러짐과 정신적인 쓰러짐 두 가지다. 그러니 엄마는 자신처럼 당신이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럴 수 없다. 내 딸이 나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연민일 것이며 사랑일 것이다. 그러니 당신을 저 멀리 놓아줄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야만 조금이라도 마음이 놓일 것 같다. 엄마가 시인에게 “괜찮다, 괜찮다 그래도 괜찮다고,” 말했던 것은 이러한 맥락이 숨겨져 있다. 이 말은 너는 나처럼 삶을 살지 말고, 행복해야 한다는 당부로 들린다.


 작품에서 흥미로운 것은 자신의 삶을 비관하지만 쓰러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손은주 시인의 작품에서 특이점이 있다면 이처럼 재생하는 힘일 테다. 그녀는 늘 항상 긍정을 품고 재생의 가능성을 견인한다. 이 힘을 품고 작품을 건축해 간다. 그래서 그녀에게 “탈출”은 필연이며 돌파구다. “자궁이 부어오르고 생리”가 시작되는 순간, 당신은 나를 온전히 응시하며 슬픔을 슬픔에 묻어 두기보다는 도약을 꿈꾼다. 여기서 나는 도약이라고 말했지만 도약이라고 해서 화려하거나 빛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도약은 작은 날갯짓에서 시작된다. “고열에 시달린 어깻죽지 너머 스무 살이 날개를 접었다” 핀다는 말이 이런 의지를 담아낸다. 역으로 젖은 나비의 옷을 말린다는 것은 ‘이곳’에서의 자유를 말한다. 그런데 생각해봐야 할 것은 이 작품의 제목이 왜 “붉은점모시나비”인가 이다. 나비가 날아가는 장면을 천천히 바라본 사람은 안다. 나비의 비상이 무엇인가 애틋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시는 독자와 작품과의 수줍은 대화라는 점에서 상상의 몫은 다양하겠지만 힘겹고 애틋한 감정을 시인이 담아보려고 애썼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만큼 자유로 향하는 일이 쉽지 않았음을 붉은 점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를 쟁취한 사람에게 이 삶은 얼마나 소중할까. 짓눌리고 억눌린 상태에서 최초로 숨을 쉴 수 있는 자가 꿈꿀 수 있는 꿈의 크기는 얼마나 큰 것일까. 고래의 높이만큼 클까. 높이 솟아오른 아파트만큼 우직할까. 우리는 크기를 장담할 수 없지만 어렵지 않게 이 의지가 값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다소 과잉일 수 있으나 국지적인 혁명은 아니더라도 내 가슴속에 피어오르는 작은 혁명임을 부정할 수 없다. 혁명은 무엇인가.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또는 방식 따위를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이지 않겠는가. 시인은 삶으로 그것을 증명해 냈다. 단숨에 깨지는 못했더라도 젖은 나비의 날개를 펴는 속도로 자신의 마음을 다잡고 높이 좌우로 산들거리며 솟아올랐다. 그렇다. 앞에서도 확인한 것처럼 시인이 “마지막 몸부림”(「붉은 크리스마스섬」)에 눈길을 보낸 것은 그래서 낯설지 않다.


람은 한번 태어나 한 번은 죽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그 누구도 전복할 수 없는 진리다.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시작된 삶은 반듯이 끝난다. 하지만 자신 안에서 가능성을 품고 일어선 사람은 새로운 삶을 살아낼 수 있다. 이것은 거짓이 아니다. 과거와는 사뭇 다른 꿈을 꾸고 과거와는 다르게 사물을 쳐다볼 수 있으니 그렇다. 시인은 자신 안에서 새로운 ‘나’를 발견해 이 과정을 시집에 흘려 놓았다. 그러니 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맹아의 형태로 새로운 삶은 예견된다.


은주 시인이 어떤 방식으로 그다음 행보를 그려낼지는 아무도 모른다. 모든 예술은 사후적으로 의미를 부여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부로 점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시인이 걸어가는 길목 길목마다 따뜻한 온기들이 묻어 재생될 거라는 점이다. 때론 시련도 오겠지만, 시련은 시련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생의 마지막 몸부림”이 아름다운 소풍이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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