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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종필 Dec 30. 2022

아픈 구석을 견딘다는 것

최우서 시인의 <펜로즈 계단>에 대한 서평


“푸른 날 눈부신 언어로 만나자던/ 약속은 지워지고/ 하얗게 바랜 마음만 남아 피었다”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시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문학을 통해 홀로 설 수 있을까. 그녀는 무슨 이유로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해 가며 자신의 작품 행위에 대해 질문하고 있는 것일까. 최우서 시인의 첫 시집을 읽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이런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사후적으로 정리될 수밖에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 기록들이 무엇인가 즐겁고 재밌게 느껴졌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말해 충분히 지루해질 수 있는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흥미롭게 느껴졌다. 이유를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겠으나 상식적인 측면에서 언어의 직조가 시인의 몸에 적당히 잘 배합되어 시의 기술과 어울렸다고 판단된다. 그만큼 오랜 시간 시적 훈련을 감행했던 것으로도 추측된다. 물론, 대부분의 시인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녀는 재치 있게 자신의 길을 잘 찾은 듯도 하다. 그렇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시인이 질문한 것이 어떤 형태로 이뤄졌는지, 무슨 이유로 이 흐름에 많은 애정을 쏟은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닿을 수 없는 것을 최우서 시인은 응시한다. 닿을 수 없기 때문에 닿기 위해 노력한다. 닿을 수 없다는 것은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만, 지금 현재 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최우서 시인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지금 현재 보지 못하는 표정과 몸짓과 행동과 흔들림을 새롭게 읽어내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것을 강박적으로 찾으려는 것도 아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면 매우 흡족하겠지만 이 목적보다는 새로운 것을 보기 위해 애쓰는 과정 자체에 보다 많은 품을 들인다. 어쩌면 이러한 행위 자체가 독자를 붙잡는지 모른다. 목적을 향해 질주하는 표정보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려는 존재의 표정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자는 목적을 위해 과정이 희생되지만, 후자는 최종 도착 지점이 희극이든 비극이든 문제 않는다는 점에서 순간만이 빛난다. 그래서 독자들은 시인이 매 순간 최선을 다했던 ‘과정’을 응시하면서 독자인 ‘나’의 과정과 견주어 여러 생각들을 캐 올릴 수 있다. 


그렇다면 시인은 이 과정에서 무엇을 획득할 수 있었을까. 시인이 쳐다본 ‘저녁노을’에 대해 설명하면서 확인해 보자. 그녀는 저녁노을을 쳐다보며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다. 저녁노을이 진붉은 풍경을 연출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감정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안다. 이 풍경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풍경이거나 그림자처럼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색하거나 부끄러워서 엄마 다리 뒤에 숨어 낯선 사람을 수줍게 응시하는 소년처럼, 잠시 자신의 표정을 숨기고 있을 뿐이다. 시인도 이러한 사실을 직감했는지 “그 시선이 타인의 반영같다”(「바람의 뒤란」)라는 문장을 뽑아낸다. 즉, 피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표정 뒤에는 타자의 맨얼굴이 숨겨져 있다는 깨달음을 온몸으로 느낀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안과 밖의 경계가 애매모호한 흔적을 좇아가 ‘사이’에 서서 시적 경험을 길어 올린다. 아니다. 올린다는 표현이 잘못되었다. 길어 올리는 과정 자체를 시집에 스케치해 놓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시인이 안고 있는 순간들이 “아픔”(「바람의 뒤란」), “발목 접힌 시간”(「그의 방식은 지독하고 치밀하다」), “닫힌 문”(「순응」), “수화(手話)”(「목련꽃 언어」), “여민 나의 옷깃”(「바람에 쓰는 시」), “그리움”, “위태”(「나비의 꿈」), “겨울”(「2월의詩」), “비어 있는 내 일기장”(「3월」) 등과 같이 내부와 외부가 짓눌린 순간들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구겨진 화자는 자연스럽게 소외된 존재를 찾는다. 




비 오는 아침 

새의 젖은 날개 안쪽으로

푸른 떨림을 받아쓴다


뚝뚝 떨어지는 마른 잎 

연음법칙으로 바라메 읽는 소리


나무가 한 줄기 슬픔을 해제할 때

내부의 잔잔한 파장이

미세하게 가지를 흔든다


애써 고요해지려는 진동에 기대

날려 보낸 새의 호흡을 다듬는다


뿌리는 어둡고 은밀한 길에서 

사랑을 깊은 곳으로 이끈다


나는 오랜 떨림 끝에 

그것을 받아 쓴 첫 번째 사람 


          「사랑한다는 것은」 부분 



“나는 오랜 떨림 끝에/ 그것을 받아 쓴 첫 번째 사람”이라고 시인은 자신의 포부를 용기 있게 밝힌다. 여기서 그녀가 시로 쓰려고 하는 것은 “새의 젖은 날개 안쪽으로” 떨어지는 “푸른 떨림”이며 나무의 눈물이다. 인간은 나무와 동일한 종족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러한 시선은 인간이 볼 수 없는 불가능한 영역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불가능을 가능한 형태로 적기 위해 애쓴다. 이 행위에 있어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이 과정에서 얼마만큼 진정성 있게 보거나 냄새 맡으려 하는지가 더 값지다. 이 여정 속에서 새로운 길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그러나 아쉬운 지점이 없지 않다. 시인의 발언과 행위가 궁극적으로는 서우서 시인 자신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니 그렇다. 시문학사에서 문학이 부조리한 대상을 타격한 이력이 있었기 때문에 부조리를 외면한 작품에 대해 옳은 것과 덜 옳을 것을, 좋은 작품과 덜 좋은 작품을 이야기할 수도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개인 성향의 작품을 문제 삼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도 항상 옳지 않다. 시는 근본적으로 자기 고백을 통한 개인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교환 불가능한 결을 무수할 수 없다. 그것 그대로 하나의 소중한 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야말로 부조리며 폭력이며 이데올로기다. 하지만 한 명의 독자로서 소재 확장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즉, 내 곁에서 쓰러져 있는 소외된 존재들까지 온전히 담아내기에는 최우서의 ‘시론’ 자체가 아쉬울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의 독자들은 시인이 듣거나 받아 적으려는 순간들이 획일적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오해는 하지 말자. 시인이 말처럼 “그것을 받아 쓴 첫 번째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것’의 변주를 지켜봐 주는 것도 독자의 일이니 그렇다. 사람마다 걷는 것도 뛰는 것도 속도가 다르니 그녀의 발걸음을 응원해 주자.


개별적인 것이 보편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나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확장된다는 것도 이제는 너무나 진부한 발언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최우서 시인의 시집 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시적 주체는 ‘시(詩)’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양한 질문을 가능하게 해 준다. 그러니 텍스트가 매력적인 것은 분명하다. 다만 그녀의 문학을 응원하는 입장에서 조금 더 나은 행위를 기대하기에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물론, 문학에는 정답이 없으니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런 입장 또한 하나의 의견일 뿐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어떤 사람일까. 그녀는 제 자리에 있는 사람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벗어날 수 있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 돌고 돌아도 다시 제 자리에 정착해 있다. 시인이 ‘펜로즈 계단’ 개념을 차용한 것도, 아무리 멀리 떠나더라도 끝내는 항구에 도착해 다시 떠나야 하는 “정착을 모르는 습관”(「우듬지 일기」)에 초점을 맞춘 것도 그런 이유다. 무엇보다도 ‘나’를 경유해 선택한 대상들은 하나 같이 온전하지 못하다. 불안하고 어둡다. 가끔은 발이 푹푹 빠지는 사막에 버려져 있다. 붉어지고 싶어서 붉어지는 꿈을 꾸기 위해 노력하지만 붉어지기 힘든 나날의 연속이다. 어쩌면 이러한 날의 반복은 권태로 번질 수도 있겠다. 시적 화자는 인간이 살 수 있는 생물학적인 시간을 대부분 살아낸 듯도 하다. 활기찬 일도 새로운 일도 발견하기 힘들다. “오늘에서 내일로/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것은/ 예전의 지금의 내가 겹치는 일”(「마흔 살」)임을 잘 알고 있기에 더더욱 시인은 새로운 날을 기대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행위가 마냥 안쓰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시인은 철저히 자신을 응시하는 과정에서 ‘나’와는 다른 ‘나’를 객관적으로 분석해 지금 보다 더 나은 ‘나’를 설계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니 그렇다. 권태를 모르는 사람은 권태의 치명성을 대비할 수 없지만, 이미 아는 사람은 권태를 마구잡이로 가지고 놀 수 있다. 그러니 최우서 시인은 자신의 삶을 즐겁게 요리한다. 무엇보다도 본인 스스로도 흔들리는 주체를 일으켜 세우려고 한다. “태풍의 눈이 쓸고 간 오랫동안 나는/ 내 안의 빛을 끝끝내 지키고 있어요”(「빛의 시작 혹은 끝」)라는 구절과 힘든 과정 속에서도 “희망 언어를 걸고/ 자존감 높이 곧추세운다”(「눈물의 미학」)는 다짐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이처럼 시인은 ‘나’를 통해 ‘나’를 건강하게 하고 ‘나’만의 방식으로 대상을 소화한다. 



등나무가 등나무 그늘에 엉겨 있다 


수만 갈래 길을 내어 하늘을 오르는 가지들 


부드럽게 입술을 틀어 올리며 서로를 포근히 감싸고 있다 


처음 마음먹은 곳은 흐릿하고

끝없이 뻗어 있지만 

가야 할 길은 지울수록 늘어나 등나무꽃 냄새가 깊다 


내가 견뎌야 할 텅 빈 공간에 


그리운 그림자가 있다 


처음 발을 디딘 길을 따라 


끝을 향해 손을 꽉 잡고 있는 


등나무 가지 끝 


하늘의 풍경 소리가 우리의 따뜻한 그늘이다 


          「등나무 그늘에서」 전문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최우서 시인의 작품이다. 화자는 등나무를 보며 여러 상념에 빠져든다. 등나무의 움직임을 천천히 쳐다보며 참 신기해한다. 이 광경을 쳐다보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꽃향기도 마음껏 들이킨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앞에서 확인한 것처럼 자신을 펜로즈 계단과 동일시하며 방황하기보다는 정확히 ‘끝’을 응시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미로의 끝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니 독자는 흥미롭다. 무엇보다도 평범한 끝이 아닌 낙관적인 입장에서 서술되기에 이 작품에 애정이 간다. 시인은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부정했던 것이 아니라 부정 자체를 끓어 안으며 손잡는다. 더 이상 좌절하거나 흔들리는 않기로 작정한 듯하다. 당당히 이곳 서 있다. 병든 ‘나’를 치유한 ‘나’가 주변을 응시한다면 그녀의 문학은 어떤 길을 뻗어나가게 될까. 시인 특유의 촉촉함과 거리 두기가 독자들에게 새로운 무엇인가를 선물할 것 같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나르시시즘을 품고 있다. 사랑도 사랑 나름이지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힘만큼 큰 것은 없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자기애의 표정은 그래서 낯설지 않다. 신화에 자기애의 감정이 다뤄졌다는 점은 오랜 시간 인간이 이 감정에 탐닉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시집이 꾸며질 때 자연스럽게 ‘나’의 이야기가 고백의 형태로 적히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고백’에 대해 상찬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나’를 배제할 수 없다. 노골적으로 ‘나’가 사라진 시집이라도 어떤 방식이든지 ‘나’를 통과할 수밖에 없다. 내가 이 문장을 적는 이유는 『펜로즈 계단』에서 자주 확인하게 되는 ‘엄마’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다.


엄마는 어떤 방식이든지 ‘나’를 넘어선다. ‘나’는 홀로 설 수 있지만, 자신과 묶여 있는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홀로 설 수 없다. 지독한 인연으로 묶여 있는 것이 ‘나’와 ‘엄마’와의 관계다. 끊고 싶어도 끊어질 수 없는 또 다른 방식의 펜로즈 계단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우연인지 의도적인 작업이었는지는 모르나, 이러한 이유로 시인은 자신의 작은 시집에 ‘엄마’를 애달프게 등장시킨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엄마는 어떤 존재일까. 엄마는 끝에 서 있는 존재다. 존재 끝에서 죽음을 응시하는 사람이다. 다소 냉정하게 적었지만, 인간은 누구나 한 번은 끝과 마주하니 특별하지 않다. 엄마는 이곳에서 남들보다 조금 더 멀리 가까이 있을 뿐이다. 


생물학적인 나이 때문일까. 젊었던 시절에 많은 고생을 했기 때문일까. 얼마는 예전처럼 음식 맛을 잘 느끼지 못한다. 시인은 “그 모습으로라도 견뎌 달라고”(「독」) 애걸하지만, 이 바람도 결국에는 욕심이다. “마루에 쪼그리고 앉은 햇살 어머니 손등에 검버섯”(「어머니의 소묘」) 피운 지 오래고 “더 이상 새순 따윈 돋지 않는/ 그녀의 낡은 숫자 90”(「당신을 접목하는 봄」)이다. 엄마가 늙는다는 것은 자신도 함께 늙는다는 것을 피부로 감각한다는 말이 되니 어쩌면 더 서글프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삶은 삶을 반복해 나간다. 인간은 이 공간에 잠시 머물고 사라지는 존재일 뿐이다. 또 다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으로 장소나 공간을 채우고 메우고 사라진다. 시인의 삶과 엄마의 삶도 마찬가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평론가인 나도 동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망을 꿈꾼다. 이곳에 다시 멋지게 살아내기를 희망한다. 이 바람은 시집에서 환상의 방식으로 때론 서정적이고 수줍은 목소리로 채워진다. 



얼마간 맨발의 냉기를 견디며 서 있었다


그 사이 몇 계절이 허공을 내달려 빙점 아래 닿았고


얼었던 씨눈 꿈틀거리며 일어섰다


마당 한편 고목이 된 감나무 위 까지 스쳐 가듯 

잠시 다녀간 후에

가물가물 기억이 얇아진 어머니


남새밭 푸성귀에 서리 내리고

싸락눈 내려 얼었다 녹았다 한다


날 풀리면 한번 다녀가라 


푸석한 어머니의 목소리에 

봄이 서둘러 뿌리 아래를 제촉했다


빈 가지에 낭랑했던 기억들 불러 모아 


어머니 마지막 꽃망울을 피우고 있었다 


초라한 댓돌 위의 한 생을 봄날이 더듬거렸다 


          「다시, 봄」 전문 



얼마는 딸에게 “날 풀리면 한번 다녀가라”라고 말한다. 이 목소리는 평범한 목소리가 아니다. 마지막 숨이 붙은 아련한 목소리다. 다시 봄이 왔을 때, 시인은 엄마를 만날 수 있었을까. 아니면 엄마의 푸석한 이 목소리가 마지막이었을까. 그것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평생토록 이 작은 목소리가 시인의 가슴을 오래도록 붙들고 있을 거라는 점이다. “초라한 댓돌 위의 한 생”은 그래서 반어적인 표현이다. 무엇보다도 엄마에 대한 이러한 시선은 그녀가 걸어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지 모른다. 즉 소재 확장의 출발이 ‘엄마’와 유사한 존재로 확장될 수도 있는 것이다. 변주해 표현하자면 엄마의 빈 공간이 다른 것들로 채워질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펜로즈 계단』은 시인의 의도가 적절한 형식과 만나 잘 버무려진 맛있는 비빔밥 같다. 그녀가 걸어간 다음 행보를 지켜보지 않을 수 없다. 독자들에게도 무명(無名)인 이 시인의 시집을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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