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중인 엄마
오랜만에 약간 고바위인 우리 집에 올라갔다 분명 내 집인데 갈 수가 없다니 안타까웠다 친정에서 10분이면 되는 거리를 대충 한 30분 걸린 거 같았다. 체력을 좀 키웠고 이 정도면 괜찮겠지 생각했다 혹시 몰라 천천히 올라가는 내 발걸음은 조심스러웠고 다행히 몸은 힘들지 않았다 다만 나의 심장은 물밖로 나온 물고기처럼 팔딱팔딱 세차게 뛰었다 '어우 날 버리고 가..!' 같이 가던 엄마에게 말했다 뭘 버리고 가냐고 천천히 가면 된다고 끝까지 나와 함께 올라갔다 좀 앉아서 쉬고 싶었는데 할 수 없지 얼른 올라가서 쉬는 수밖에.
드디어 도착한 집 문을 열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이게 사람 사는 집인가 싶었다 돼지우리가 따로 없었다 언제부터 열려있었는지 모를 냉장고 문은 활짝 열려있었고(냉동만두가 해동이 되어있었다) 언제부터 안 했는지 모를 설거지는 산처럼 쌓여있었다 설거지를 안 해서 컵이 없어 종이컵으로 첫째가 물을 마시고 있었고 거실 바닥에는 개지 않은 빨랫감과 치우지 않은 쓰레기들이 아이들 발에 이리저리 치이고 있었다 펼쳐놓은 빨래대에 있던 이불 위에 각종 물건들이 올라가져 있었으며 식탁 위며 아일랜드 위 뭐 올릴 틈 없이 물건들이 오합지졸로 가득 차 있었다 베란다는 끔찍했다 차마 상태을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문 열자마자 보이는 게 이 정돈데 각 방의 상태와 화장실은 안 봐도 뻔했다
우리가 들어갔음에도 남편은 '처'자고 있었다 말이 곱게 써지지 않는다 이런 돼지우리보다 더 한 곳에서 내 새끼들을 키우고 있다니 분명 어제 힘들다고 못 치우겠다고 집안이 엉망이여도 뭐라고 하지 말라 해서 알겠다고 대답한 내 입을 치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소리치고 싶었지만 엄마가 집에 와서 기뻐하는 아이들에 그리고 같이 온 엄마는 이런 상황을 몇 번 봤는지 덤덤하게 거실을 정리하고 있었다 열을 받았다 일단 '처'자고 있는 저 남자부터 해결해야 했다 '당장 안 일어나나?!' 소리치지 않겠다는 다짐은 나도 모르게 실패하고 말았다 집안 꼬락서니에 눈이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배가 고프다는 첫째의 말에 일단 화를 조금 뒤로 미루기로 했다
배가 고프다는 시간은 첫째가 어린이집에 갈 시간이었다 일단 뭐라도 먹여야 했다 아직도 비몽사몽인 남편에게 당장 뭐라도 구워라 했고 평소 나보단 할머니인 둘째 녀석이 엄마인 내가 집에 오니 그래도 엄마라고 좋은지 활짝 웃으며 내게 안겨왔다 잠시나마 상황을 잊고 행복했다 이럴때가 아니지 아침 준비하는 남편을 뒤로하고 첫째 옷부터 갈아입혔다 잠옷 차림으로 갈 수 없으니까 엄마 아프다고 집에 없다고 아빠는 묶을 줄 모르겠다며 맨날 풀어헤친 머리도 오늘은 이쁘게 묶어주고 삔도 꼽아줬다 꼬질한 얼굴은 급한 마음에 물티슈로 닦아줬다 어제 씻겼다더니 왜 이래?
가득 찬 식탁 위를 한쪽으로 밀어버리고(공간이되?) 첫째의 아침이 준비되었다 ..뭔가 이상했다 제일 중요한 무언가가 없었다 바로 밥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나는 밥은 어딨냐며 물었고 남편은 아주 당당하게 밥 없어라고 했다 기가 찼다 어쩌겠나 당장 어린이집 가야 하는데 첫째의 최애 음식인 너겟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아침부터 할머니에 엄마까지 계 탄 둘째. 정신없이 행복해하다가 너겟 냄새에 자기도 배고픈지 울기 시작했다 밥은 없었고 둘째도 첫째가 남긴 너겟을 먹었다 미안했다 내가 아파서
이 집안을 해결하기 위해선 일단 남편부터 빨리 내보야했다 자기가 안치운 집이면서 같이 온 엄마가 치우고 있고 자기는 멀뚱멀뚱 서있는 모습을 보니 울화가 치밀었다 내 정신건강을 위해서 저 '놈'부터 없애야 했다 아니 내보내야 했다 다행히도 오늘 집으로 올라온 이유가 남편 치과 때문이었고 둘째를 봐주기 위함이었다 겨울나기를 위한 내 짐을 챙겨 오기 위함도 있었다. 아침을 먹을 만큼 먹은 첫째를 데려다 주라며 얼른 내보냈다 내 눈치를 보면서 안 나가는데 한대 치고 싶었다 내 눈치가 보이면 좀 치우지 남편은 저런 곳에 자도 상관없는데(자기가 어지른 거니까) 내 아이들은 아니다
드디어 나갔다 울화가 치밀었던 내 마음은 절반 정도 소거되었다 이제 치워볼까 싶었더니 이젠 둘째가 말썽이다 자기와 놀아줘야 하는 엄마와 할머니는 청소한다고 자길 봐주지 않는다고 심통이 났나 보다 하는 수없이 티브이를 틀어주었다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니 할머니를 따라 베란다에 있던 녀석이 함박웃음을 하고 뛰어왔다 역시 애들에겐 티브이가 최고다 자 이제 진짜 치워보자 두 팔을 걷고 거실 바닥부터 치웠다 보통 위부터 치우고 아래를 치우지만 도저히 답도 안 나오는 바닥부터 치웠다 물티슈로 빡빡 닦으며 끝에서 끝으로 이동했다 아이들이 먹다 흘린 과자 부스러기와 주스들 덕에 아주 끈적하고 발에 뭐가 자꾸 거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