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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서울

명순 언니와 포크송 1

    코로나 팬데믹, 방구석 생활은 자연스러운 일상이 돼버렸고 봄날의 생기가 너무도 그리운 그 무렵이었다. 놀라운 낭보가 날아들었다. 난공불락의 벽 같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75세의 한국 배우가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었다. 나이 오십에 연기하겠다고 연극판 뛰어든 내게도 엄청난 사건으로 다가왔다. 순식간에 ‘배우 윤여정’에 빠져들었다. 

    젊은 세대까지 사로잡는 에지 있는 수상소감, 영어 인터뷰쯤 즐겁게 씹어먹겠다는 듯한 여유, 거기에 해외에서만 40개가 넘는 상을 받은 연기자! 화제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이전 출연작들도 덩달아 회자가 되었다. 그의 출연 영화 중 데뷔작 [화녀] (1971. 김기영 감독)가 단연 두드러졌다. 빨리 영화를 내 눈으로 영접하고 싶어 서두르다가 홍보 문구 앞에서 멈칫했다. ‘서울의 부유한 가정에서 일하게 된 식모가 치정에 얽혀 결국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 식모… 이젠 쓰이지 않는 그 단어가 문득, 오래전 헤어졌지만 오래도록 내 안에 살아있는 한 사람을 불러냈다. 보려던 영화는 잠시 밀어 두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명순 언니… 청담동에서 압구정으로 이어진 내 10년의 유년기를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채워준 나의 램프 요정.

   초등학교 1학년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낯선 사람이 부엌에 있었다. 콧등에 앉은 안경이 신기할 정도로 두꺼웠다. “오늘부터 함께 살 식모다. 명순 언니라고 불러라.” 쭈뼛거리는 내게 할머니가 인사를 시켜줬다. 명순 언니는 바쁜 엄마와 할머니를 대신해 살림을 맡았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맏이였던 내겐 언니요 멀리 살던 이모 대신이었고 나아가 요술램프이자 멘토였다.

    명순언니는 손으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 척척박사였다. 특히, 인형 옷을 기가 막히게 만들어 줬다. 바쁜 그를 졸졸 따라다니며 마론인형의 옷을 만들어달라고 졸랐다. 언니는 잠을 줄여, 헝겊 조각으로 만든 화려한 드레스와 뜨개질로 만든 멋들어진 작은 코트를 내 손에 건네주었다. 덕분에 친구들과 인형 놀이를 하면 단연 내 인기가 최고였다. 명순 언니는 대가족 삼시 세끼 챙기랴 살림하랴 우리 삼 남매 학교며 학원 쫓아다니랴, 하루 24시간이 정말 부족했을 텐데, 한 번도 인형 옷을 만들어 달라는 내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언니는 나만의 패션 디자이너였다.

       언니는 처음에는 2층 작은 방에서 잤다. 하지만 곧 나와 합방(?)했다. 내가 언니와 같이 자고 싶다고 졸라댔기 때문이었다. 언니와 나는 자연스럽게 가족이 되어갔다. ‘요술 공주 세리’에 빠져 있던 내가 라디오의 세계로 입문한 것도 온전히 명순 언니 덕분이었다. 언니는 힘든 집안일이 끝나면 이부자리에 누워 라디오를 틀고 두꺼운 책을 읽었다. 나도 덩달아 언니 옆에 엎드려 라디오를 들으면 책을 펼쳤다. 우리 둘은 매일 밤 ‘지지지지직’ 소리가 나올 때까지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어서 자라고 호통치는 할머니를 피해 한 여름에도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쓰는 열렬 애청자를 자청했다. 

    당시 방송국에 엽서를 보내 예쁜 엽서로 뽑히면 방송국에서 기타 같은 여러 가지를 선물로 줬다. 그 선물이 탐이 난 언니와 나는 관제엽서를 한 뭉텅이를 샀다. 온갖 사인펜과 색연필을 휘두르며 그림을 그리고 사연을 적어 보내고 지어도 보냈다. DJ는 단 한 번도 우리의 엽서를 읽어주지 않았지만, 우린 한주도 빠짐없이 방송국으로 엽서를 보냈다. 

    언니와 내가 함께 열중하던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범죄행위로 간주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녹음한 테이프를 리어카에서 팔기도 했다. 노래를 녹음하는데 DJ의 목소리가 끼어들기라도 하면 언니와 나는 동시에 분노에 찬 소리를 지르곤 했다. 

    명순 언니 덕분에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꽤나 조숙한 아이로 통했다. 동요보다는 가요를 불러 젖혔고, 친구 생일이면 인기 가요가 빼곡하게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를 선물했기 때문이었다. 또 학교 소풍의 꽃, 장기자랑 시간엔 윤복희의 ‘여러분’을 그럴싸하게 불렀다. 그때마다 엄청나게 박수를 받았다. 나의 단짝 명순언니는 논두렁밭두렁의 ‘다락방’을 즐겨 듣고, 늘 경쾌한 목소리로 이렇게 흥얼거렸다.

                                      우리 집에 제일 높은 곳 조그만 다락방

                                      넓고 큰 방도 있지만 난 그곳이 좋아요

                                      높푸른 하늘 품에 안겨져 있는

                                      뾰족 지붕 나의 다락방 나의 보금자리…

                                       (2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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