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는 패션이지!] #2화: 원더우먼의 뷔스티에

본성 따위는 없다

by beyond juri
테미스키라에선 평범한 전투복이었던 뷔스티에(이미지 출처: 구글 제미나이 3.5)



오후 3시의 해방 충동


오후 3시쯤 되면 하루의 스트레스가 최고치다. ‘아, 당장 집 가서 브라부터 풀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6시까지만 참자, 6시까지만.'

한데 원더우먼은 아예 반대로 간다. 참는 대신 "이거 눈 딱 감고, 그냥 밖에 입고 나가볼까? 슈퍼맨도 팬티 밖에 입던데, 뭐.”


이렇게 탄생한 게 그 유명한 빨강-금색 뷔스티에다.


속옷이 겉옷이 되는 순간, 안/밖의 선 긋기가 애매해진다.



애매함 자체가 정체성


스타킹은 속옷인가? 겉옷인가? 얼핏 생각하면 애매한 것 같지만, 조금만 돌려 생각하면 명확하다. 속옷과 겉옷 여부는 치마 길이가 결정한다.


스타킹은 스스로 고유의 본성이 없다. 스타킹의 성격은 치마가 결정한다. 치마가 길어지면 속옷의 비중은 줄어들고, 치마가 짧아지면 속옷의 비중은 반대로 커진다. 그때 그때 다르다. 확정할 수 없는 …….


그러면 레깅스는? 레깅스는 좀 다르다.

레깅스는 내복을 외출복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한 케이스다. 사실 레깅스의 성격은 세대마다 달랐다. 2010년쯤 레깅스만 입고 나가면 "저 사람 바지도 안 입고…….”라며 수군댔다.


지금은? 출근복으로 입는 경우가 흔하다. 물론 세대에 따라 한 번 더 돌아보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눈을 흘길 정도는 아니다.


코르셋? 빅토리아 시대엔 드레스 안에 숨겼는데, 지금은 뷔스티에로 겉에 입는다.

나시? 예전엔 런닝셔츠였는데 이젠 탱크톱이라 여름이면 여성들의 필수템이다.


뭐가 달라진 걸까? 레깅스가 달라진 게 아니라 우리의 경계선이 움직인 것이다.


안과 밖의 차이는 물리적 위치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다. "이건 안에 입는 거야"라는 암묵적인 룰. 누군가 이 합의를 무너뜨리면 갈등이 일어난다. 그리고 새로운 합의에 도달하면서 사회는 변한다.

바로 원더우먼이 그 '누군가'다.



테미스키라에선 그게 겉옷이에요


본명 다이애나, 국적 테미스키라, 나이 미상, 현주소 불명. 자신의 나라에선 이 뷔스티에가 그냥 평범한 전투복이었을 거다.

안도 밖도 아니고, 그냥 ‘옷’.

근데 섬 밖 세계에 오니까 문제가 생긴다.


"어? 저 여자 속옷만 입고 다니네?”

"아니, 이게 우리 동네 전투복인데요.”

"근데 전투복이 왜 그래?”

"음 …… ???. 우린 이렇게 입고 전투하는 데요?"


슈퍼맨의 빨간 팬티가 ‘바깥에 입은 속옷'이었다면,
원더우먼의 뷔스티에는 ‘속옷이었던 적 없는 겉옷'이다.
애초에 안/밖 구분이 없는 세계에서 온 옷.


처장 폴 고티에의 원뿔 브라 코르셋. 속옷인가, 무기인가(이미지 출처: https://buly.kr/6XnvD2K)



코르셋이 왔다갔다 한 500년


코르셋은 시대에 따라 안과 밖을 넘나들었다. 16~17세기엔 드레스 안에 숨겼다가, 18세기엔 겉으로 드러냈고, 빅토리아 시대엔 다시 숨겼다. 1940년대 원더우먼은 뷔스티에로 밖에 입었고, 1980년대엔 마돈나가 등장한다.

마돈나는 란제리를 겉옷으로 입고 무대에 올랐다. 그냥 입은 게 아니라 무기처럼 입었다. 장 폴 고티에가 디자인한 뾰족한 원뿔 브라는 속옷인지 의상인지, 무기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여기서는 "이거 속옷 아냐?”라는 질문 자체가 무색해진다.


2000년대 알렉산더 맥퀸은 코르셋을 드레스 위에 올렸다. 숨겨야 할 보정 속옷이 오히려 가장 화려한 메인 아이템이 되는 순간이었다. 2020년대엔 코르셋 탑과 브라렛 탑이 당당히 겉옷이 됐다.

이젠 아무도 "저거 속옷 아냐?”라고 묻지 않는다.



A이면서 B인 옷


슈퍼맨의 빨간 팬티는 '안에서 밖으로' 나왔다. 명확한 이동이었다.

원더우먼의 뷔스티에는 다르다. 안도 밖도 아닌, 혹은 안이자 밖인 제3의 영역. "이건 A야, 저건 B야"라는 명확한 분류 자체를 거부한다.

"이건 A이면서 동시에 B일 수 있어."

이게 원더우먼이 계속 소환되는 이유다.



유영하는 사람들


그러니 오늘 누군가 당신에게 "그거 입고 나가도 돼?"라고 했다면, 축하한다. 당신은 지금 안/밖의 경계선 위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중이다.

"왜 이건 안에, 저건 밖에 입어야 하는 거야?"

이상한 건 당신이 아니라, 그 질문이다





[히어로는 패션이지!] 연재 예고


#1화: 슈퍼맨의 빨간 팬티, 도시로 온 이민자 - 어느 이방인의 어리숙한 생존 패션(2월 14일 토, 연재완료)

#2화: 원더우먼의 뷔스티에_ 속옷인가? 갑옷인가?(2월 21일 토 오전 8시, 연재 완료)

#3화: 헐크의 보라색 바지_ 포기 못한 자존심(2월 28일 토 오전 8시, 연제 예정)

#4화: 아이언맨의 쫄쫄이_ 영웅마저 외주화(3월 27일 토, 시리즈 마지막 회, 연제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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