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는 끝났고 녹음이 남았다
고객 대응이 걸린 회의는 대부분 내가 간사를 맡는다.
예상치 못한 이슈에 대응하고, 팀의 방향을 정해야 하는 자리다. 데일리나 위클리 같은 루틴한 회의는 아니다. 말 한 줄이 남고, 그 말이 나중에 다시 호출될 수 있는 회의다.
회의가 끝나면 회의록을 쓴다. 결정된 사항과 액션 아이템을 남긴다. 누가 언제까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든 논의를 적을 수는 없다. 회의의 냄새가 느껴질 만큼만 핵심 문단과 표현을 남겨야 한다. 그 한 줄 때문에 부서 간에 다툼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었다”는 연락이 오고, “오너가 잘못됐다”는 수정 요청이 이어진다. 회의에서 분명히 했던 말이, 회의실을 나서는 순간 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회의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보험 같은 것이었다.
내가 잘못 적은 건지, 정말 그렇게 말했던 건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회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기도 했다. 기술적인 내용을 따라가지 못해 뭘 남겨야 할지 모른 채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회의록 작성이 생각보다 많은 공부가 되었고 큰 짐이기도 했다. 결정은 종종 바뀐다.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데이터가 달라지고 상황이 바뀌면, 결정과 방향이 바뀌는 게 오히려 정상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결정이 바뀌는 순간 나에게 돌아올 질문은 “이거 왜 그렇게 했냐”였다. 네가 이렇게 지시했잖아.... 그 질문에 답하고 싶지 않았다.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판단의 근거를 기억 대신 녹음으로 남기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얄팍한 내 기억도 믿지 못하겠다. 그래서 업무 전화도 녹음한다. 상사가 부르면 휴대폰을 쥔 채 녹음 버튼을 누르고 자리로 간다. 일종의 저장하지 못하면 미치는 병인지도 모르겠다. 입사 후 지금까지 모든 메일과 결재건까지 저장되어 있다. 메신저의 내용도 주기적으로 저장하고, 메일로 오고 가지 않아 증거가 남지 않는 업무 처리 건들은 하이라이트를 모두 캡처해 두었다. 모든 대응 자료는 언제든 찾아볼 수 있게 내용을 색인해 키워드별로 엑셀로 정리해서 보관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네 잘못이다 소리를 듣기 싫어서 시작된 보험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일이 생겼다. 회의가 끝난 뒤나 이슈가 있으면 히스토리를 찾기 위해 사람들이 나를 찾기 시작했다.
“그때 뭐라고 했었죠?”, “그 말, 정확히 어떻게 표현했나요?”
의사결정의 진위 여부가 내 녹음 파일에 남아 있다고 다른 팀의 리더들도 알고 있다. 녹음되지 않아도 어떠한 형태로든 나에게는 모든 증거들이 남아있고 정리되어 있었다.
그래서 내가 발전했느냐? 아니, 그럴수록 회의록은 길어졌다. 책임을 피하기 위한 문장들이 늘어났고, 맥락을 설명하는 문단들이 추가됐다. 어느 순간, 내가 쓰고 있는 건 회의록이 아니라 녹취록에 가까워져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녹음이 남았고, 회의록이 쌓였고, 하루는 계속 짧아졌다. 회의에 한 시간을 쓰고, 회의록에 삼십 분을 쓴다면 나는 거기에 한 시간을 더 썼다. 녹음을 다시 듣고, 내용을 정리하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확인했다. 그런 회의가 하루에도 몇 개씩 있다 보면 저녁이 되어서야 내 일을 시작할 수 있었고, 그때쯤이면 이미 하루치 집중력은 대부분 소모된 상태였다.
그래서 출근 시간을 앞당겼다.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6시에 출근했다. 아침 8시에 있는 미국 팀과의 회의 전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을 수 있는 그 두 시간만이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 나는 전날의 회의를 다시 듣고, 회의록을 보완하고, 다음 회의를 준비하고 하루를 준비했다.
어느 순간 판단이 남긴 말들을 보관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회의를 녹음한다. 여전히 회의록을 쓴다.
나는 엔지니어인지, 사관인지, 아니면 그냥 증거 보관소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