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남아 있는 사람
말했지만 채택되지 않는 판단도 있다.
그날의 나는 침묵하지 않았다. 기술적인 근거를 들어 설명했고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리스크도 이야기했다. 데이터는 불길한 방향을 암시하고 있었고, 이미 실패한 전적도 있는 선택이었다. 내 머릿속에서는 도저히 플랜 B가 떠오르지 않았다. All or Nothing.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회의실에서도 특별히 반박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 말이 잘 전달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회의는 다른 방향으로 정리되었다.
"일정상 불가능합니다. 어려운 것 알지만 지금은 이 선택이 최선입니다. 어떻게든 해야됩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내 설명을 부정하지도 않았지만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회의록에 내가 말한 우려가 마킹되었지만 결정 사항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판단이 틀려서 배제되는 것과 판단이 채택되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틀린 판단에는 이유가 붙는다. 설명이 나오고, 반박이 따른다. 하지만 채택되지 않은 판단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처리된다. 문제가 생겼을 때 "왜 그때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냐"는 말은 듣지 않겠지만 기록에는 다른 결정만 남는다. 회의가 끝나면 그 판단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진다. 결정으로 채택되지 않는 순간 그 판단은 조직의 역사에서 없던 일인 것이다. 조직의 역사에서는 사라지지만 그 판단을 했던 사람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어야 한다.
이제 회의에서 말을 할 때마다 이 말이 옳은가가 아니라, 이 말이 채택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나는 기술을 계산하러 이 자리에 왔는데, 이 말이 수용될 가능성과 내가 말할 자격까지 계산해야 하는 순간이 온 거다. 그리고 그 계산은 엔지니어의 영역은 아니었다. 지금 나는 회의에서 어떤 결정이 내려질 때마다 두 가지를 같이 생각한다. 하나는 조직이 요구하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결정이 만들어지기까지 내가 했던 판단들을 조용히 정리하는 일이었다. 누가 시킨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누구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명백하게 내 몫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