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한 길만 판다는 것의 오해

나는 한 길을 판 게 아니라, 길을 연결해 왔다

by 오줌보

나는 10년 넘게 반도체 공정 엔지니어였지만 단 한 번도 한 분야의 전문가였던 적은 없다.

보통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10년은 일해야 한다고 한다. 일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것도 어디서 주워 들었다. 공정 엔지니어라는 테두리에서 한 길만 판 것 같지만 막상 꺼내놓을 만한 '나만의 기술'은 없다.

나는 왜 10년이 지나도 '전문가'라는 말을 쉽게 쓰지 못할까?

처음 팀에 들어왔을 때 PA(Process Archetecture)는 모든 걸 다 알아야 한다고 했다. 정말 모든 것을 다 아는 똑똑한 선배들이 있었다. 나도 시간이 지나면 그들의 발끝이라도 따라가겠지라고 생각했다.

공정은 기본이었고 소자, 신뢰성, 수율, 테스트, 설계, 레이아웃, 분석 모든 단계를 찍먹 해가며 거쳐왔다. 말 그대로 거쳐왔다. 늘 그 사이 어딘가를 오갔다. Integration 엄무를 하다 보면 다양한 것들을 이어 붙여야 하고 그러려면 일단 얕고 넓게 라도 모든 걸 알아야 한다. 그들의 언어를 알아야 제대로 된 곳에 이어 붙일 수 있었다. 아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라도 있어야 했다. 깊이를 파기보다는, 끊임없이 경계면을 메우는 것에 급급했다. 그래서 나에게 모든 걸 다 알아야 한다는 말이 실상은 어느 하나도 제대로 모른다는 말과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 내 일에 대해서 당위성을 주기 위한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버티고 싶었다. 다른 것에 뛰어들 자신도 없었다.

어쩌면 내 업무는 하나의 기술을 끝까지 집요하게 파고드는 일이 아닌 것 같다. 기술이 기술로만 남지 않게 만드는 일이다.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는 기술들을 연결하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오해를 없애고, 리스크를 대비하는 역할. 그래서 이 일은 깊어 보이지 않는다. 항상 중간에 있고, 항상 다음 단계로 넘겨진다. 개발과 양산의 경계에 있으며, 공정과 소자를 오가고, 불량이 있어서 때로는 수율, 신뢰성, 설계, 레이아웃을 넘나들어야 한다.

이 일을 하다 보니 항상 경계에 있으면서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새 불안은 성격이 아니라 습관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언제나 내가 하는 결정은 크기보다 방향에 가깝다. 눈에 띄지 않지만 뒤늦게 영향이 보인다. 확신을 가지고 결정하는 날은 거의 없다. 다만 더 미루면 안 되는 시점이 있을 뿐이다.

지금 내 기술이 얕아 보인다면, 아마도 내가 늘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맞다. 한 길만 판 게 아니다. 그저 아무도 오래 서 있으려 하지 않는 자리를 그냥 계속 지켜왔을 뿐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연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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