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가 판단을 대신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나에게 요즘은 숫자보다 문장이 중요한 날들이 더 많아졌다.
데이터를 붙여 넣는 데서 끝나지 않아야 한다. 반드시 질문이 따라온다.
"그래서 이걸로 뭐 할 건데?"
입사 전 내가 생각하던 이상적인 프레젠테이션은 간략함이고 미니멀리즘이며 임팩트였다. 컬러링과 도형에 집중했고 이미지에 매달렸다. 나에게 프레젠테이션은 '스티브 잡스'였고 그가 알파이자 오메가였다. 그러나 실제로 입사 후 내가 경험한 엔지니어의 프레젠테이션은 정 반대였다. 엔지니어의 호흡이 담긴 프레젠테이션은 멕시멀리즘에 가까웠고 때로는 논문 같았다. 그 빽빽한 차트와 글들.
선배들은 늘 말했다. 엔지니어는 숫자로 승부해야 한다고.
수많은 계측값, 웨이퍼 맵, 웨이블 차트, 그래프, 포뮬러, 스트럭쳐 모델링까지 이 많은 것들을 다 담아내기에 내게 하얀 한 장의 슬라이드는 좁디좁았다. 어떻게든 꾹꾹 눌러 담다 보면 좁쌀만 한 글씨는 물론이요 수많은 주석을 붙여야 했다.
그 슬라이드는 어느새 악명 높은 인구 밀도를 자랑하는 홍콩의 몬스터 빌딩이요 초이홍 에스테이트였다. 하지만 그 슬라이드 어디에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는 적혀 있지 않다. 판단은 언제나 그 바깥에 있다.
어느 순간부터 회의가 끝나도 결론이 남지 않는 경우가 늘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데이터도 충분했고, 검증도 끝났고, 논리적으로도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아무도 결정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늘 비슷한 말로 마무리됐다.
"조금 더 검토해 봅시다"
"정리해서 다시 이야기합시다"
문제는 데이터가 아니라 이 숫자들이 어떤 판단으로 이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였다.
숫자는 결정을 내려주지 않는다. 다만, 판단이 시작될 조건을 만들어 줄 뿐이다.
그래서 숫자 옆에 문장을 붙여야 한다. 결과 옆에 전제를 적고, 판단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설명한다.
공정 엔지니어에게 말은 부수적인 옵션이 아니다. 기술이 조직과 고객을 통과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다. 기술을 그대로 두면, 각자의 언어로 오해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 기술이 어떤 전제에서 유효한지, 리스크가 무엇인지를 반드시 말로 정리해야 한다. 그 말이 없으면, 슬라이드는 많아지지만 결정은 미뤄진다. 기술을 단순화하거나 말장난으로 포장하는 게 아니라 내 기술이 잘못 이해되지 않게 만드는 것,
그것 역시 말의 역할이다.
Risk Assessment, Success Criteria, FMEA 같은 도구들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공통으로 이해할 수 있는 툴을 쓰는 이유는, 그것들이 엔지니어의 말을 대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들은 말하지 않아도 어떤 전제에서 판단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흔히들 공돌이는 말에 익숙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말을 못 하는 게 아니다. 다만 구두로 할 설명을, 형식과 포맷으로 바꿔 표현한다. 그것이 엔지니어의 언어일 뿐이다.
결국 엔지니어도 말로 먹고 살아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엔지니어는 판단을 말로 책임지며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