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고객은 틀리지 않는다 다만 불안할 뿐이다

엔지니어는 답이 아니라 판단을 설명한다

by 오줌보

"You need to be a lot more paranoid"


어느 날 미팅 말미에 고객이 던진 한 마디는 요청도, 질문도 아니었다. 어딘가 뾰족했다.


제안하는 공정 변경점에 대해서 꽤나 심혈을 기울인 Risk Assessment, Sucess Criteria를 제시했고 논의를 나누었다. 결과는 모르기에 이제 검증을 시작해 보면 될 일이었다. 실패하면 왜 아니었는지 분석해 보고 다음 평가로 넘어가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 말은 곧 기술적인 비난처럼 들렸다.


"아직도?!"


자존심이 상했다. 제품 초반 그는 성을 내기도 했고 나를 긁는 소리를 곧잘 하곤 했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훈련되었고 무언가 그와 나 사이에 라포도 있고 컨센서스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팅 이후 의기소침한 상태로 상황과 내 자료를 복기했다. 그리고 그 문장은 기술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리스크에 대한 공포에 가까웠다는 걸 알아차렸다. 기술을 몰라서가 아니다. 고객은 나보다 훨씬 경력도 많고 똑똑한 전문가다. 나의 제안은 어느 순간 일정, 책임, 리스크를 이미 고객 쪽으로 넘기고 있었다.


고객의 말이 거칠어지는 순간은 대개 비슷하다.

데이터가 부족해서나 설명이 없어서도 화가 나겠지만 주로 결정해야 할 시점이 다가왔을 때다. 제한된 일정 안에서 변경점의 적용 여부를 결정해야 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은 결국 고객이 떠안게 되는 구조.


그 순간부터 리스크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고객이 감당해야 할 문제가 되기에 고객은 방어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이 데이터와 결론이 합당하고 충분한가?"에서 "내가 이 리스크를 진짜 감당할 수 있는가?"로.

기술의 문제를 넘어 책임 소재가 이동했다는 말이다.


엔지니어는 보통 그 말을 기술적인 언어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데이터와 설명이 늘어나고, 이전에 검증된 결과를 다시 검증한다. 내가 옳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그 근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고객은 설명이 아니라 확신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확신은 단순한 숫자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고객이 진짜로 듣고 싶은 것은 답이 아니라 답에 이르는 과정이 통제되고 있다는 확신이다.


공정 엔지니어로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그 불안을 반박하는 게 아니라 잘게 나누는 것이다. 이미 관리되고 있는 리스크와 아직 설명되지 않은 어떤 공백을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정리한다. 내가 뭘 알고, 뭘 모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결정을 하는 이유를. 그렇게 정리된 판단을 가져가면 고객의 말은 한결 누그러든다.

구조를 만들어 보여주는 순간 고객의 불안은 질문이 되었다.


그 이후의 대답은, 그다음의 일이다.

내일의 나에게 맡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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