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나는 더 이상 데이터를 만들지 않는다

측정은 줄고 판단은 늘어났다

by 오줌보

나는 더 이상 데이터를 만들지 않는다.

이 문장을 처음 쓰면서, 생각보다 오래 멈춰 있었다. 알 수 없는 회한이 들었다.

분명 한때는 그게 내 일이었다. 선배들이 짜놓은 평가 계획을 검증하기 위한 데이터를 모으는 것. 시간이 오래 걸렸다. 결과가 바로 나오지 않았다. 라인을 들락날락 거리면서 땀에 쩔어서 사무실에 복귀했고, 분석실에서 시료 만드느라 시간을 보내고, Inline, DC trend에 펼쳐진 수많은 dot을 보면서 최면에 걸린 듯 졸기도 했다. 이게 뭔지도 제대로 모른 채로 무작정 데이터를 만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시간은 잘 갔고 야근의 연속이었기에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알 수 없는 성취감을 느꼈고 그 과정이 엔지니어의 일이라고 믿었다. 아니 그게 전부라고 믿고 싶었다.

입사 이래 공정 엔지니어로 제품과 노드는 바뀔지언정 Integration이라는 업은 동일하게 유지해 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술적인 성숙함을 느끼기보다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할 뿐이었다. 연차가 쌓이는 것이 두려웠다. 내가 저 선배들의 연차와 지위가 되었을 때 그들만큼의 아웃풋을 보여줄 자신이 없었다. 선배들에게 고민을 이야기하면 "나도 다 겪어온 고민이다", "너도 이 정도 오면 다 할 수 있다", "지금 잘하고 있다 걱정하지 마라", "본인을 과소평가하지 마라"라고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그 말들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게 왜 위로가 되는지도 이해하지 못했고 나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느낀 것에 한 치의 의심이 없었기에 남의 의견을 귀담아듣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공부는 또 하기 싫었다.

시간과 경험이 쌓이다 보니 "일을 몰라도 일이 되게 만들 수"는 있었다. 그리고 운이 좋아 언제나 결정적 위기의 순간에는 누군가가 구세주처럼 등장해 해결해 주거나 도와주었다. 참 운이 좋았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어영부영 흘렀다. 어떻게든 일들이 지나갔다.


결국 직장은 있는데 직업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였다. 데이터를 쌓고 쌓아도 질문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는 데이터를 만드는 대신 남이 만든 데이터를 골라내고, 연결하고, 설명하는 일을 한다. 어느 순간부터 고객 대응 업무가 주를 이루기 시작했다. 고객은 숫자만 들여다보는 것 같아도 실상은 그 속에 항상 불안을 숨겨둔다. 그러다 보니 나 역시도 그랬다.

그리고 불안은 이 일을 오래 했다는 신호에 가깝다.

그래서 질문은 늘 비슷하다. “이 판단은 정말 괜찮을까?”
그 질문 앞에서 확신을 가진 적은 없다. 다만 더 미루면 안 되는 시점을 알 뿐이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지금까지의 데이터를 한 방향으로 정리해야 한다. 공정과 공정 사이, 기술과 기술 사이에는 항상 빈칸이 있었고, 그 빈칸을 그냥 넘기면 언젠가 문제가 됐다. 남들 모르게 그 빈칸을 채워두기 위한 나만의 아카이브를 별도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데이터 자체보다 "논리 없이 정리되고 나열된 데이터"가 무섭다.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된다. 조직 내에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렇지만 막상 고객을 설득할 때는 그 빈칸이 키가 되고는 했다. 책임은 늘 그렇게 조용하게 다가왔다. 이 일이 기술에서 멀어진 것인지, 아니면 기술의 다른 레벨로 이동한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데이터를 만들지 않는다. 대신, 누군가가 안심할 수 있는 판단을 만든다. 결정을 내리기보다는 결정이 가능한 지점을 만드는 사람에 가까워졌다. 기술을 잘 아는 사람보다 기술을 오해하지 않게 만드는 사람이 더 필요한 순간이 있다. 엔지니어로써는 치명적일지도 모르겠다. 기술을 잘 모르는 엔지니어라니.


어쨌든 나는 지금,

그 자리에 서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00. 불완전한 데이터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