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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담은 세상들

오랜만에 남한산성

by Unikim

오랜만에 남한산성을 찾았다.

언제나 정겹고 아름다운 역사의 장.

우리는 제일 먼저 개원사에 올랐다.

남한산성 개원사 일주문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에 다다랐다.

남한산성 개원사 천왕문

뚜둥~~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문이 닫.혔.다.

클로징 타임이 4시라 한다 ㅠㅠ

이르다. 빠르다.

남한산성 개원사 4시에 닫힘

처음 있는 일이다.

사찰의 문이 닫히다니...

신기하고 당황스러운 우리.

아쉬움을 남긴 채 다음 목적지로... 고고...

현절사

헉....

이번엔 현절사인데 이곳 역시 문이 닫혀 있다.

현절사 풍경

그런데 우리는 이번 답사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개원사의 '寺사'자'와 현절사의 '祠사'자는 그 한자가 다르다 한다.

개원사 할 때 '寺사'자는 사찰사이고 현절사 할 때 ''祠사'자는 사당사이다.


현절사 전문
현절사 안내문
현절사
顯節祠
경기도 유형문화재

현절사는 병자호란 때 청에 항복하기를 거부하다가 심양으로 끌려가 처형당한 홍익한 1586 ~ 1637, 윤집 1606 ~ 1637, 오달제 1609~ 1637 등 삼학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숙종 25 년 1699 에는 주전파 김상현 1570 ~ 1652 과 정온 1569 ~ 1641 의 위패도 함께 모셨다.. 부속 건물을 합하여 3 동으로 구성되었는데, 단아하고 소박한 인상을 주어 조선의 선비 정신을 말해주는 건물이라 할 수 있다. 병자호란 때 조정은 청나라와 화의를 주장하는 주화파와 끝까지 싸우자는 주전파가 대립하였는데 결국 주화파의 의견대로 화의가 이루어져 인조는 삼전도에서 항복하였다. 청나라는 끝까지 전쟁을 주장한 조선의 대신들을 볼모로 데려갔다. 삼학사는 당시 청나라에 끌려간 대신 중에서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참형을 당한 사람들이다. 사당은 이들이 처형된 지 50 년만인 숙종 14 년 1688 에 유수 이세백의 주도로 세워졌으며 숙종 19 년 1893 에 왕은 현절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이후 고종에 이르기까지 국가에서 제사를 모셨다. 현절사는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중 하나인 통치경관 제의사설에 해당한다.

출처 : 현절사 앞에 세워져 있던 보드에 쓰여진 글을 그대로 옮겨 적어 놓았습니다. 바로 위 사진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이곳은 매주 토요일 행사가 있다고 한다.

서흔남 묘비.안내문

지난번엔 발견하지 못해 아쉬움이 컸던 서흔남 묘비를 이번 방문에는 찾아서 만날 수 있었다.

서흔남 묘비
徐欣男 墓碑
지정종별
광주시 향토문화유산 기념불 제6 호
위 치 I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124 - 1

병자호란 당시 수훈을 세운 서흔남 ( 徐欣男 : ?~ 166 丁? )의 묘비이다. 서흔남은 수어청 병사의 사노로서 무당, 와장 등의 직업을 전전했다. 1637 년 ( 인조 15 ) 청나라 군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여 외부와 연락이 단절되자 서흔남이 연락업무를 자원하였다. 그는 병자, 불구자, 거지 등으로 변장하고, 때로는 창군병사를 살해하면서 청군진영을 세 번이나 왕복했다. 이러한 공으로 노비 신분에서 면천되고, 당상관이 되었다. 1651 년 ( 효종 2 ) 에는 남한산성 성벽과 4 대문 문루, 동북창사의 보수공사에도 참여해서 목재 조달 업무를 관장했다. 후에 정 2 품 가의대부로 적봉 되고 종 2 류 동지중추 부사가 되었다. 묘비중 하나는 1667 년 ( 현종 8 ) 3 월 13 일에 건립했다. 또 하나의 비는 손상이 심해 건립연대를 알 수 없다. " 한 씨를 왼쪽에 묻었다 ( 韓氏和左 )"는 문구로 보아 부인이 사망한 후에 다시 세운 것 같다. 이 비들은 남한산성면 검복리 병풍산에 있던 것을 광주시청과 광주문화원에서 발견하여 1998 년에 이 위치에 안치하였다.

출처 : 현절사 앞에 세워져 있던 보드에 쓰여진 글을 그대로 옮겨 적어 놓았습니다. 바로 위 사진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서흔남묘비

이 연못은 지수당 앞에 위치한 연못이다.

지수당 앞 연못
지수당 地水堂
Jisudang Pavilion ( Jisudang Pond - side Pavilion )
1958 년 I 국가기록원 제공

지수당은 현종 13 년 ( 1672 ) 부윤 이세화가 건립한 정자이다. 건립 당시에는 정자를 중심으로 앞뒤에 3 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 개의 언못만이 남아 있다. 「 중정남한지 」에 남학명이 쓴 지수당기에 의하면 대개 '지수당 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처음 당을 세울 때였으니 대개 주역 대전 의 ' 백성을 포용하고 기른다'는 뜻을 딴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연못 가운데에는 ' 관어정이라는 정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빈터만 남아있다.

출처 : 현절사 앞에 세워져 있던 보드에 쓰여진 글을 그대로 옮겨 적어 놓았습니다. 바로 아래 우측 사진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지수당과 그 사 연

이 정자에 앉아 보니 어찌나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지 그 냉기가 마치 에어컨 바람 같았다.

지수당

연못을 끼고 있는 정자 이어서일까?!!

우리의 옛 건축물에는 과학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자수당 연못

받침이 받쳐져 있는 이 나무는 무려 200년이 넘는 세월을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0세가 넘은 남한산성 보호수
자수당 앞 묘비
자수당 묘비 확대

봄 하면 꽃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어여쁜 꽃들만큼이나

아름다운 것이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연둣빛 잎들일 것이다.

연두 연두한 봄 잎

이 연둣빛은 이 계절에만 볼 수 있는 잎의 색이다.

여름이 되면 청록이 우거져 진한 녹색 빛을 드러 낸다. 그래서 난 이 계절의 이 연둣빛이 너무나 좋다^^

연두한 단풍잎
빠알간 이것은 무엇
봄 풍경

여기에 늦은 벚꽃과 햇살까지 더하여지니

그 장면은 빛이 난다.

햇살과 봄 잎
감성 가득 산책길....
햇살과 연두 잎

주차장에 서서 그 어디를 찍어도 작품이 된다.

풍경
봄의 풍경

역시 이 계절은 아름답다^^

남한산성의 봄 풍경

이 아름다움들을 어쩝니까?!!

광주 힝일 운돝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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