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척수공동증, 신경 속에 피어나는 빈 공간
1. 현실 - 점점 사라지는 감각
은서는 커피잔을 들고 있다가
잠시 멈췄다.
“이거, 뜨거운 거 맞지...?”
컵은 김이 났지만
손바닥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잠시 후, 왼쪽 팔에서
묘한 무게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상해.
만지긴 하는데, 감각이 없어.
무거운지 가벼운지도 모르겠고...
뜨거운 것도 그냥... ‘기억’처럼 느껴져.”
그녀는 손을 내려다봤다.
분명히 있는 손,
움직이고 있는 손.
하지만 ‘이 손이 내 것이 맞나?’
하는 이질감이 퍼졌다.
2. 내부 – 척수 중앙, 비어 가는 지도
척수 중심부.
감각의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회백질 내부.
그 안,
시린고(Syringo)라는 이름의 감각 신경 노드가
급히 신호 경로를 점검하고 있었다.
“L1부터 T8까지 감각소실 발생!
고온/저온 구분 불가!
경고: 통증 전도 차단!”
시린고는 모니터에 뜬
척수 단면의 지도를 바라봤다.
그 지도 한가운데...
검은 구멍이 퍼지고 있었다.
“이건 감각의 공백이야...
우리가 무언가를 느끼는 그 순간,
그 회로가 지워지고 있어.”
그리고 그는 메모리에 떠오른
한 문장을 되뇌었다.
“피는 지나가지 않았다.
추골동맥의 줄어든 흐름은
우릴 침묵시킨다.”
3. 현실 – 차가움도 뜨거움도, 멍하게
은서는 퇴근길,
왼쪽 발에 눈이 닿았을 때
몸이 반응하지 않는 걸 깨달았다.
“차가워야 하는데...
그냥 ‘물리적인 접촉’만 느껴져.
온도 감각이 사라졌어.”
그녀는 주차장에서
잠시 멈춰 섰다.
자신의 다리를 손으로 두드렸다.
아무 반응 없이.
“감각이 없다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였나.”
공포는 고통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
무反응,
무자극,
무감각~
그건 존재의 경계가 무너지는 공포였다.
4. 내부 - 공동 속으로 침잠하는 신경
시린고는
척수 내부를 떠다니며
전도 경로를 손으로 쓸어봤다.
“이건 신경의 해변이야.
원래 여긴 온도와 통증 정보가 넘실댔지.
지금은 다 빠져나가고,
남은 건 빈 껍질뿐이야.”
그는 공동(cavity)의 중심으로 다가갔다.
벽은 흐릿했고,
신경 말단이 뚝뚝 떨어져 있었다.
“우린 죽는 게 아니라,
서서히 느끼지 않게 되는 거야.
그게 더 잔인한 죽음이야.”
그리고 작은 쪽지 하나가
공동의 입구에서 바람에 흩날렸다.
"Syringomyelia -
그 시작은 늘,
산소의 부재에서 온다."
5. 현실 – 병원의 말, 더 깊은 침묵
은서는 다시 병원을 찾았다.
감각이 이상하다고 말하자
의사는 말했다.
“자율신경계의 과민반응일 수도 있고요...
그냥 신경 피로에 의한 증상일 수도 있어요.”
그 말이
얼마나 끔찍하게 공허한지,
그 순간 은서는 알았다.
그녀는 속으로 말했다.
“아니야.
지금 내 몸 안에는
무(無)가 피어나고 있어.
그걸 아무도 듣지 못하는 거야.”
에필로그 – 감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메아리칠 뿐
감각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게 끝난 건 아니다.
그건
몸이 보내는 신호가
목소리를 잃은 것일 뿐.
우리는 종종
침묵을 ‘회복’이라고 오해한다.
하지만
그건 종종
붕괴의 시작이다.
다음 화 예고
제10화 – “시야의 균열, 소뇌의 절규”
은서는 이제 중심을 잃고,
걸음이 흐트러지며,
시야가 흔들리고 멀미처럼 어지럽다.
소뇌는 균형을 잃고,
몸 전체는 균형 감각의 마지막 끈을 놓기 직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