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로이루리 glory Jun 28. 2024

그 때 '같이 가자' 말해 주었으면 좋았을텐...


 2022년에 나는 50살이 되었다. 동시에 큰아이는 고 3, 예고 입시를 준비하는 작은아이는 중3이었다. 내 나이가 오십 줄에 들어섰다고 푸념할 겨를조차 없었다. 3년터울이다 보니 둘다 입시생이 된 것이다.

 큰아이를 낳고 나서 육아로 인해 전업주부 생활을 했던 나는 5년전부터는 중등 온라인 학습 관리 선생님으로 재택 근무를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두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면 집안 일을 해 놓고 2시부터 9시, 늦게는 10시까지 일을 했다. 틈틈이 시간을 내어 장을 보고, 전화로 학습 관리를 해주는 일을 하다가 두 아이 오는 시간에 맞춰 방문을 열고 나와 학원 가기 전에 밥을 챙겨주고, 늦은 시간 집에 오면 또 밥을 챙겨줬다. 일이 많은 편이고, 몇 분 단위로 학습관리를 촘촘히 해주어야 해서 정작 나는 10분 안에 저녁 식사를 해결해야 했고, 월 마감 때는 시간이 없어 저녁을 걸렀다. 여름 방학이 되면서 예고 입시가 본격화 되어 미술학원에 작은아이 점심 도시락을 가져다 주어야 했다. 엄마가 오후에는 일을 하니 저녁은 사먹거나 시켜 먹어야 하는데 점심까지 사먹으라고 할 수는 없었다. 최대한 정성스럽게 도시락을 싸서 식기 전에 자전거로 급히 실어다 날랐다. 


 이 생활 패턴 중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사치는 오전에 시간을 내어 댄스를 가는 일이었다.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댄스를 배우고 운동을 하는 것이 즐거웠다. 주 3회 댄스를 마치고 나면 회원들은 어김없이 근처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티타임을 가졌다. 음악과 댄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흥이 많고 정도 많은 멤버들이었다. 내가 이 분들과 댄스를 취미로 시작한 것은 큰아이가 4학년 때부였다. 같이 시작했던 지인분께서 회사를 나가면서 못하시게 되어 댄스를 같이 그만뒀던 기간이 있었고, 등록을 재개하고서도 바쁘고 힘들다는 이유로 중간 중간 많이 빠졌다. 더군다나 나는 댄스 동작을 다 외워가거나 하는 열심 회원도 아니어서, "너는 그만둘 것 같다 싶으면 용케 나오더라" 라고 놀림 받을 정도였다. 그러니 댄스 실력은 늘지 않고 남들 보면서 따라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왜 나오나 싶은 회원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서로 알고 지낸지 오래 되어 남편과의 관계, 시댁 얘기, 아이들 교육 문제 등등 마음 속 얘기도 나누는 사이였던 것 같다. 언제나 유쾌하고 친절하고, 안쓰럽다며 어깨를 안아주면서 커피를 사주던 다정다감했던 댄스 언니들... 그런데 나는 두 명의 입시생을 두었고, 집에서 일도 하는 엄마였기 때문에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고슴도치처럼 뾰죽하고 날카로웠다. 


 고3이었던 아들은 정시로 입시를 치러야 했다, 정시로 많이 보내는 학교라는 것은, 그 학교에서 내신 받기는 매우 어렵고 내신을 잘 받아도 수시 원서에 쓸 수 있는 스펙이 거의 없어서 정시에 매달릴 수 밖에 없는 학교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고 2때부터 정시파이터로 일찌감치 들어섰던 아들은 고3 모의고사 성적표를 잘 가져오지 않았다. 나는 바빠서 아이 말만 듣고 그래도 공부를 곧잘 하고 있다는 착각을 했던 것 같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똑똑했던 우리 아들이 못 할리 없다 여겼다. 특히 6월 모의고사는 잘 봤다. 늘 수학은 2~3개 틀리는 것 같았고, 국어 문제가 어렵게 날 수록 잘 보는 편이었다. 과탐도 점수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수능 결과는 참담했다. 수능 보고 온 날 수학은 잘 본 것 같아서 저녁을 같이 먹고 기분 좋게 집에 들어왔는데, 책상에 앉아 과탐 채점을 하면서 어깨가 들썩 들썩 하고 있었다. 우는 것 같았다. 생명과학을 제일 잘 했던 녀석이 생명과학을 완전히 망친 거다. 과탐 점수가 대폭 하락하니 정시로 넣을 대학이 없었다. 이공계는 안되고 문과만 지원 가능한 학과로 떴다. 


 남편은 "그냥 재수해. 문과 갈 거 아니잖아. 원래 생명공학 가고 싶어 했으니 아무 대학이나 넣어." 어차피 떨어질 거란 말이었다. 정보도 없고 누가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고, 큰 비용을 주고 받은 컨설팅은 도움이 안 되는 거 같았다. 앞이 캄캄했다.


 한 달 정도 후에 수능 점수가 나왔고, 수시를 지원했으나 수능을 못 본 것 같다던 라인댄스 회원 들 중에서도 자녀가 합격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직접 듣지는 못했어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정시는 우리 아들 밖에 없으니 내 어두운 얼굴만 봐도 어느 누구도 말을 건넬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마음이 지금은 이해가 된다. 나도 그랬을 거 같다. 정시는 원서를 넣고 결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 노심초사하면서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한다. 운동을 해야 숨통이 트일 것 같아서 댄스를 하러 나갔다. 

 그런데 그 날 따라 회원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의아했지만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아무 생각 없이 댄스를 마치고 물어보니, 6명의 멤버들이 대만 여행을 간 거였다. 어느 누구도 나한테 같이 가자고 말을 꺼낸 사람이 없었다. 섭섭했다. 공부 못하는 자식, 아니 시험을 못 본 자식을 둔 나는 사람 취급도 못 받는구나 싶었다. 이후 댄스 멤버들에 대한 마음이 문이 닫혔고, 나만의 동굴에 들어갔다.  


 작년 아들은 원하던 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내 마음이 풀린 걸까. 나를 그토록 힘겹게 했던 학습 관리 일도 작년말에 그만두었다. 수능 전날, 핸드폰 녹취가 안된다고 AS센타에 가서 고쳐오라는 지시를 받아 그 날 밤 못했던 일을 늦게까지 하느라 다음날 정신줄을 놓았는지 아이 도시락을 안주고 보내는 해프닝을 벌였다. 아이를 시험장에 데려다 주고 왔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다행히 친구폰을 빌려서 전화를 한 거 였다. 급히 도시락을 가져다 주었기에 망정이지 밥을 굶고 수능 시험을 볼 뻔했다. 아이도 아침부터 도시락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을 거다. 


 돌이켜보면 아이 입시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생각하고 싶다. 그 당시 사람들의 말 한마디가 왜 그렇게 상처가 되고 왜 힘들었는지...나름대로 나를 배려했던 마음을 받아 들이지 못했던 것인지... 

 그래도 그 때 "같이 가자' 누구라도 말을 해줬으면 나는 쿨하게 "난 애들 때문에 못 가. 잘 다녀와~" 그랬을텐데. 호탕하게 잘 웃고 따뜻하게 위로해 주던 그들이 문득 보고 싶다. 사람들 사이의 '섬'을 나 스스로 만들었던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완전 럭키비키잔앙! '원영적 사고'의 영향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