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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이루리 glory Jun 29. 2024

'나만의 방'을 가질 수 있다면



 토요일 아침 기분 좋게 일어나 커피를 뽑아 들고 주방 탁자에 앉았다. 어제 미처 못 읽었던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복잡한 생각을 정리해 볼 생각이었다. 책을 펼쳐 놓고 시험기간인 딸아이가 아직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몇 번에 걸쳐 깨우니 간신히 졸린 눈을 뜨고 일어난 아이는 자기도 밖에 나와서 공부를 가겠다고 한다. 다시 책을 읽으려고 하는데 "아침밥은?" 평소에는 차려줘도 시간 없다고 거의 안 먹는데 공부하려면 배고프니 뭐라도 달라고 한다. 냉장고 문을 열고 과일을 줬다. 다시 앉았다. 집중이 안되는지, "엄마, 하나만 말해도 될까?" 하면서 말을 꺼낸 게 벌써 세 번째다. 탁. 책을 덮었다. 일어나서 단 한 줄도 읽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이게 내 일상인 것 같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잠들었을 때, 커서는 학교나 학원에 가고 나서야 내 시간이라는 것이 주어졌다. 그 시간도 다 쓸 수는 없었다. 해야 할 일들을 챙겨 놓고 나서야 주어지는, 남겨지는 시간만이 나를 위해서 쓸 수 있는 시간이다. 그래도 시간은 내가 알아서 조절할 수 있다. 나의 것이니까.  집중 여부에 따라 1분도 1시간처럼 쓸 수 있는 기적 같은 일을 이뤄낼 수도 있으니. 


 문제는 나만을 위한 공간이다. 안방에 내 책상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뭔가를 하고 있으면 남편이 자야 한다고 불을 끄라고 하거나, 왠지 오싹해져서 보면 뒤에서 글 쓰는 것을 보고 있다가, "밥은 언제 줘? 돈도 안 되는 일을 뭐 그리 열심히 해?"라는 단 두 마디의 말로 내가 어렵게 쌓아놓은 자존감을 무너지게 만든다. 여성이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겠다고 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나만의 방> 이 절실히 와닿는다. 페미니즘 비평의 선구자로 알려진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작가가 되거나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여성들도 연간 500파운드(월 400만 원 정도)의 안정적인 고정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면서 재능 있는 여성이 외부 조건에 제한받지 않는 세상을 꿈꾸었던 그녀는 과거에 받았던 성적 학대의 괴로움, 우울증, 정신질환으로 우즈강 근처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59세의 나이였다. 가족의 공동 서재를 떠나 자신만의 방을 찾고 인간을 서로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리얼리티와 연결해 더 생각해 보기를 바랐던 버지니아 울프가 활동했던 1920년대에는 여자가 도서관에 들어가려면 대학 연구원을 동반하거나 소개장을 소지해야 했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여자도 언제든 혼자서 도서관에 갈 수 있고, 학위를 인정받을 수도 있다 (그 당시 여자대학은 있었지만 학위를 인정받지 못했다고 함) 참정권도 있고, 재정권도 있다.


  나는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연간 500파운드 수입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봤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얼굴에 분이나 바르느라 재산을 물려주지 못하신 것이 아닌가 탓도 하던 울프는 뜻하지 않게 고모님이 남겨주신 유산을 받게 되면서 놀라운 변화를 겪었다. 그전에는 원하지 않는 글도 억지로 쓰면서 생활을 했는데, 안정적인 수입이 생기니 자기만의 공간에서 마음껏 창작의 욕구를 실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속물근성이 아닌가 인정하고 싶지 않더라도 100년 전에도, 100년이 지난 지금도 이게 여성 작가들의 엄연한 현실이다. 


 '나만의 방'을 가지라는 버지니아 울프의 외침이 와닿는 토요일 아침, 그 방을 지금은 결코 가질 수 없는 나의 현실을 직시하고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 '고정적인 수입'에 대해서도. 글을 쓰는 분들의 가장 큰 고충은 수입이다. 힘겹게 책을 발간해도 수입은 많지 않을 것이다. 글쓰기 초보인 내가 수입까지 바라는 것은 과욕임을 안다. 솔직히 '500 파운드'가 아닌 '50 파운드'만 되어도 좋겠다. 고정적으로 들어온다면... 

욕심은 내 마음을 가리고 삶의 지경을 좁게 만든다. 더 나아갈 수 없게 한다. 버리자. 고정적인 수입, 나만의 방에 대한 욕구를... 버지니아 울프도 유산을 받지 못했으면 이루지 못했을 꿈같은 일이다. 



 커피를 다 마시고 조용히 방에 들어왔다. 남편은 늦잠을 자고 있다. 코까지 골면서. 피곤한가 보다. 이어폰을 끼고 글을 쓴다. 스탠드 불은 제일 약하게 1단계로 해 놓았다. 남편이 잠에서 깰까 봐 키보드도 살살 쳐가면서 그나마 내 책상이 있어서 다행 아닌가 위안 삼는다. 책을 읽을 때, 글을 쓸 때, 거실이든 부엌이든 그곳이 바로  '나만의 방'이라 여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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