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봤을 때가 기억난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이들을 키우는 것도,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도 다 힘들어질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일들에 지쳐갈 무렵이었다. 바보처럼 멍한 상태로 케이블 채널을 돌리던 중, 카페에 앉아 누군가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여자 주인공의 얼굴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나도 모르게 채널을 멈추고 보게 된 드라마였다. 앞자리에 앉은 할아버지는 연인 때문에 힘들어하는 그녀에게 "스즈, 지금 아무리 슬프고 힘들어도 당신은 반드시 행복해집니다. 스즈는 아이를 위해서 목도리를 짜는 사랑스러운 엄마가 되고, 손자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자상한 할머니가 됩니다. 모두 스즈를 매우 좋아합니다. 나는 이렇게 떠나지만 쓸쓸하지 않아요. 언젠가 당신과 만나게 될 테니까요. 스즈 덕분에 정말로 행복한 인생이었어."라는 말을 해준다." 그 노인의 정체를 알 수 없어서 그다음 내용이 더욱 궁금했고 이 여자가 어떻게 살게 될지그 결말 또한 궁금했다. 할아버지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그녀를 위해 찾아온 미래의 남편이었다는 설정이 좀 황당하고 기묘했지만 나도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천사처럼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지금 조금만 참으면 된단다, 너는 반드시 행복해질 거라고 확신에 찬 말을 던져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과거의 아픔까지 보듬어주는 그런 남편이 있다면 그 여자는 살아 있는 동안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스즈는 미래의 남편이라는 그 노신사에게 "그럼 제가 죽음을 맞이할 때 당신이 옆에 있었나요?"라고 묻는다. 노인은 그녀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고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지만 병중임에도 호텔에 있느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잘 있었고 끝까지 옆에 있어 주었다고 말해 준다. 노신사와의 만남 이후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연인과의 이별 후에도 상처받지 않고 더 단단하게 살아가게 된다. 이 잔잔한 영화는 2편까지 제작되었을 정도로 많은 인기를 누린 것 같다. 후편의 이야기는 궁금하지 않았다. 나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할 뿐...
살면서 기쁨과 고통은 흰색과 검은색이 앞뒤로 된 양면 색종이처럼 걷잡을 수 없이 색을 바꿔가면서 찾아온다. 우리 큰 아이가 중학생 때였다. 큰애 친구네 가족과 베트남 나트랑으로 여행을 갔었다. 나트랑 리조트 수영장에서 튜브 위에 둥둥 떠서 야자수 나무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 참 행복하다. 더할 나위 없이.' 속으로 중얼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다음날 새벽에 태풍 때문에 풀빌라가 떠내려갈 듯이 무섭게 비가 쏟아져 내렸다. 나는 빗소리에 깨어나 일기예보를 주시하면서 태풍경로를 확인하다 정말 큰일 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식구들을 깨워 짐을 챙겨 들고 호텔 로비로 향했다. 이미 물이 들어차고 있어서 호텔 쪽에서도 여행객들을 대피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아들 친구의 엄마가 영어를 잘해서 급히 택시를 불러 공항으로 향할 수 있었다. 자연재해보다 무서운 것이 없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하루 자유 일정을 가지지 못한 것 외에는 여행을 잘 마치고 돌아와서 다행이다 싶었는데 불운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건강하시던 아빠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돌아가셨다. 나는 그때부터 산다는 것에 대한 불안한 마음이 생겼다. 나는 어떻게 되어도 견뎌낼 수 있겠는데 위기가 닥쳐왔을 때 아직 어린 두 아이를 내 힘으로 지켜 줄 수 있을까 두려웠다. 남편만 믿고 의지할 수가 없었다. 그도 사람이고 위기에 나보다 약할 때가 많아 보였다. 강해져야만 할 것 같았다.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그 이후 코로나 위기가 닥쳐왔고 많은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끔찍한 일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래도 우리는 다 지금 살아서 이렇게 글도 쓰고 힘들다는 말도 하면서 지내고 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삶에 지치고 힘들 때, 나만 그렇다는 생각을 덜어내고 싶어서다. 좋을 일이 있을 때는 감사하면서 다음에 안 좋은 일이 생기더라도 좋았던 기억을 버팀목으로 삼으며 살아간다. 버티어내면 또 신기하게도 조금씩 좋은 일이 생긴다. 크든 작든 좋은 일들은 기록하면서 오래 기억하려 노력하고, 안 좋은 일은 가능한 기억에서 지우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우리의 기억은 안 좋은 일을 더 많이 기억해서 똑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으려 하겠지만, 인위적인 노력으로 안 좋은 일들은 내면의 깊은 곳으로 억지로 밀어 넣는다. 무의식이 어느 날 갑자기 그 기억들을 끄집어내더라도 할 수 없다. 최대한 버티어 본다.
가장 좋은 방법은 하루하루 감사하면서 사는 습관을 가지는 일인 것 같다. <감사>라는 책에서 매일 감사노트를 적으라고 해서 일기장에 매일 5개씩 감사한 일들을 적어보려고 했는데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대신 불만을 적는 일은 쉬워 보였다. 그래도 꾹 참고 적으니 별 게 다 감사할 일들이었다. 심지어 얼마 전 이사 온 옆집의 개가 오늘은 짖지 않는 것도 감사하는 일에 들어갔다. 그런데 감사한 일 5개를 순식간에 빨리 채운 날은 정말 기분이 좋았다. 좋은 날들이 왠지 많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남편은 '남의 편'인 것 같을 때가 많다. 다정스럽지 못하고 말을 참 밉게 한다. 그래도 마음까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에 가능한 예쁜 목소리와 톤으로 말한다. "같은 말이라도 '~하라' 하지 말고 '~하면 좋겠어.' 이렇게 말해주면 좋겠네요."라고 말하면 그래도 고치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여 이 또한 감사하면서 살아간다. 미래에서 오지 않은, 현실 남편과 같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더 노력하면서 살아야 할 것 같다.
우리의 삶이 기묘한 이야기의 드라마처럼 될 수는 없겠지만 누구나 자신의 미래가 행복해지기를 바랄 것이다. 지금의 현실이 힘들수록 그 간절함은 더해간다. 좋았던 기억들을 내 삶의 희망으로 바꾸기를 바라면서 또 하루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