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멸종과 굴복, 미래를 향한 경외

by 봉비

인간의 멸종. 인간인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있는 주제인가. 김보영 작가의 <종의 기원담>은 이 대담한 질문에 주관적이고도 사실적인 이야기를 덧붙인다.


로봇들은 스스로를 의지를 지닌 ‘생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케이가 언급한 유기생물학을 기점으로 로봇들의 운명이 서서히 분기점을 맞이한다. 유기생물학의 처음은 그저 로봇이 식물을 비롯한 '진짜 생물'을 발견하고 키우는 과정이다. 이 부분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특별할 것 없는 환경을 큰 발견이라 여기고 깨닫는 과정이 우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소설의 전개가 잠시 느슨해지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지루함이 무색하게,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인간의 영롱함에, 의식적으로 위기감을 느껴 로봇의 번영과 존속을 위해 인간을 학살하는 케이가 인간인 나로서 원망스러우면서도 대단하다고 느꼈다. 인간이 없는 로봇의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로봇은 과거 인간의 종속물이었기에 이를 거스르는 위반을 찬란하다고 생각하다니, 모순이다. 세실도 인간에게 굴복할 로봇의 미래가 두려우면서도 필연적으로 그들을 찬양했던 듯하다. 그렇기에 케이에게 ‘너만이 이 세상을 끝낼 수 있을 텐데’라는 말을 했을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인간 시아의 발언이 뜻밖이라 의외였다. ‘로봇은 더 이상 인간의 명령에 따를 필요가 없으며 이 말은 모든 명령과 일에 우선한다’라니. 권력을 내려놓음으로써 신뢰를 형성하고 오히려 권력을 얻으며 안위를 보장받는다는 과정과 그의 논리가 인상적이었다. 결국에는 인간과 로봇의 공생으로 모든 혼란이 마무리되는 것을 통해 내가 사는 현실도 마찬가지일지 고민하며 미래를 경외하였다.


추신; 소설의 이야기와 별개로, 의문점이 남았다. 로봇 사회에서 케이를 비롯해 인간과 비슷한 외형과 속성을 가진 네 자릿수 로봇들은 왜 차별 대우를 받은 것일까? 과거의 로봇은 인간을 숭배했다. 인간의 이해할 수 없는 신체적 결함 따위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을 정도로 온전히 종속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인간의 외형에 유사한 로봇이 모두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경계가 오묘하게 다채로운 표정을 표면에 드러내는 그들이 왜 천대받아야 했을까? 이 조차도 작가가 독자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증폭시키기 위한 장치로서 내세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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