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on't konw

신중년의 일상

by 마마래빗

이 말은 올해 88세이신 이모님이 하시는, 웃기면서도 슬픈 이야기다. 평소 이모님은 어머니께 하루에 두세 차례 전화를 하여 “언니, 보고 싶다”며, 더 늙기 전에 자신의 집에 와서 일주일만 머물다 가라고 한다. 그러다 “우리 죽으면 살아서는 못 봐”라는 말로 대화를 마무리하곤 한다.


이모님은 서울의 오래된 주택에서 홀로 살고 계신다. 물론 가까이에 막내아들이 살고 있지만, 이모님은 처음 서울에 정착할 때부터 그 자리에 계속 머물며 네 아이를 낳고 키우고 결혼까지 시켰다. 이모부님을 떠나보낸 후에도, 항상 씩씩하게 그 동네의 터줏대감으로 종교 활동과 사회적인 문제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 몇 년 전에는 광화문 촛불 집회에도 멀리서 버스와 지하철을 몇 번 갈아타고 가실 만큼 열정적이고 활동적인 분이었다.


하루는 밤 10시가 넘어 어머니가 막 잠이 드셨을 시간에 이모님이 전화를 하셨었다. 그걸 본 나는 “이모님께 약간 치매 증상이 있는 것 같다”라고 얘기했고, 어머니는 “동네에 같이 이야기할 사람이 하나둘 이사를 가니 외로워서 그런가 보다”라며 전화를 다정하게 받아준다. 하지만 이런 전화가 잦아지면서 어머니(올해 90세)의 수면의 질이 떨어지고, 수면제에 의지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이번 겨울, 가족 여행 후 어머니가 이모님 집에서 일주일간 머무르기로 했다. 오랜만에 동생과 딸들을 만날 생각에 어머니도 한 달 동안 이모님 집과 딸들의 집에서 지내시겠다는 계획을 세우셨다. 가족 여행 후, 우리는 어머니를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리기로 했다. 가는 도중 이모님께 전화를 드리니 빨리 오라고 재촉하셨다. 어렵게 찾아간 이모님 댁은 비슷한 다세대 주택들 사이에 있어 찾는데 시간이 걸렸다. 겨우 도착한 집은 계단이 가파른 이층 집이었다. 몇 년 전, 계단에서 넘어져 고관절 수술을 하셨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현관문을 열어주신 분은 방문 요양사로, 막 가시는 참이었다.


방문 요양사가 떠나고, 우리를 본 이모님은 반가움보다는 손님이 오니 무언가 대접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음료수를 권하며 서둘러 주셨다. 어머니가 “니 소원대로 일주일 여기서 지낸다”라고 하자, 이모님은 “왜요?”라고 하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셨다. 우리가 누군지 아느냐고 묻자, 이모님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이 한마디를 하셨다.


“I don’t know”


순간,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맺히며 “왜 이러냐. 머리는 왜 이렇고, 그 곱던 순덕이는 어디 갔냐”라고 하셨다. 설마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무얼 물어도 “I don’t know”라는 답뿐이었다. 그럼에도 젊은 시절 이야기는 끊임없이 하셨다. 미대사관에서 일했던 경험, 본인이 서예로 상을 받았던 이야기, 그리고 중학교 시절 얼마나 예뻤는지, 이모부님이 얼마나 잘생겼는지 같은 이야기들이다. 그러다 어머니가 “영옥”이라는 본인 이름을 말하자, 이모님은 “어, 영옥이 언니야?” 하며 기억해 내셨다. 그와 동시에 어머니가 “왜 아까는 빨리 오라고 했냐”라고 묻자, 이모님은 “온다고 하니 그렇게 말했다”라고 하셨다. 이모님은 나와 동생 부부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끊임없이 음식을 권하셨다. 음식을 손수 차려 대접하시던 이모님의 모습을 기억하던 동생 부부는 더 안타까워했다.

돌아오는 길, 우리가 챙겨 온 용돈을 드리자 이모님은 손사래를 치셨다. 억지로 두고 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모님의 딸이자 나의 사촌 언니와의 통화에서 들은 이야기는 더욱 안타까웠다. 이모님은 지난여름 무더위에 쓰러진 후 치매 판정을 받으셨다고 했다. 자식들이 함께 살자고 설득했지만, 본인의 집을 떠나길 거부하셨다. 결국 CCTV를 설치하고 요양보호사와 자식들이 돌아가며 음식을 챙겨 드린다고 했다.


이모님은 우리가 두고 온 돈의 존재를 잠깐 기억하셨는지 계속 전화를 하셨고, 결국 어머니는 그날 밤 전화기의 전원을 끌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는 이모님이 오늘 가장 또렷하게 하셨던 말, “I don’t know” 마저 잊어버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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