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에게 왜 효해야 하나?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

by 곤이


“부모님 잘 모셔야지,” “엄마 말씀 잘 들어야 해,” “시간 나면 자주 찾아 뵐게요.” 등의 말은 우리 모두가 일상에서 익숙하게 들었다. 말은 다 달라도 하나로 귀결된다. 효(孝)해라. 그리고 이런 말들을 들을 때 우리는 막연한 부담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용돈 드리기, 병원 동행하기, 주말 식사 등 이 모든 일들을 해야 할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이 모두가 다 효일까? 보다 근본적으로 왜 우리는 효해야 할까?


『논어』에서 공자는 이 질문에 대해 재미 있는 대답을 준다.


맹무백(孟武伯)이 효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부모는 그 자식이 아플까 봐 근심한다.” (孟武伯問孝. 子曰: 父母唯其疾之憂.)


맹무백은 자식의 부모에 대한 효에 대해 질문하였는데, 공자는 엉뚱하게도 부모의 자식 사랑을 이야기한다. 얼핏 동문서답처럼 보이지만, 이는 공자의 교육법 때문이다. 공자는 “한 모퉁이를 들어 주었는데 나머지 세 모퉁이를 돌아 오지 못하면 더 가르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즉, 제자들이 스스로 정답을 찾을 수 있도록 실마리만 제시한다는 것이다. 효에 대한 답변으로 부모의 사랑을 언급한 것도 맹무백이 그 말의 의미를 곱씹어 보기를 바란 의도라 할 수 있다.


먼저 공자의 대답을 보자. 부모의 사랑은 마치 ‘조건 없는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자식이 장성했다고 해서 자식에 대한 근심과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논어』는 부모가 왜 자식에 대해 이러한 사랑의 감정을 가지는지에 대한 질문도 설명도 없다. 특별한 이유나 논리가 부재함은 부모의 사랑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밥은 먹고 다니냐, 운전 조심해라, 인사 잘 하고 다녀라 등, 부모의 자식 사랑은 한결 같다.


물론 부모의 이러한 사랑이 조건 없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해서 모든 부모가 다 이렇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한 달이 멀다 하면서 자녀 학대 사건들이 발생하듯 과거 공자 시절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인권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오늘날 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가 말한 효의 출발점은, 대다수 부모가 자식에게 보이는 무조건적 관심과 애정을 전제하고 있다.


이런 부모의 사랑을 받은 자식은 그렇다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공자는 이렇게 맹무백에게 묻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의 기쁨을 함께 축하하고, 슬픔을 함께 나누며, 나의 모든 일에 관심을 보인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마움을 느끼고 그에 응답하고 싶어 질 것이다. 부모의 사랑에 대한 자식의 반응도 마찬가지다. 받은 만큼 돌려 주고자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면, 효 역시 이러한 상호작용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맹무백과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공자의 효 이해는, 효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감정이 아니라는 점이다. 효는 부모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의미를 자각함으로써 비로소 형성된다. 어린아이가 타인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 역시 부모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의미를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공자가 맹무백에게 부모의 사랑을 상기시킨 것은 자식으로써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스스로 고민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공자는 효란 무엇인지 관념적으로 고민하기 보다는 지금까지 받아왔던 그리고 계속 받고 있는 부모의 사랑이 무엇인지 기억하고, 충실하게 그 기억과 경험에 응답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 ‘자식’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의 사랑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 자랐다. 마치 공기의 존재와 소중함을 망각하는 것처럼 부모의 사랑도 잊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누군가가 일깨워 주거나, 혹은 부모가 된 뒤에야 비로소 깨닫기도 한다. 너무나 뻔하지만 역시 잊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부모는 내가 효에 대해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