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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우다 Aug 13. 2021

나는 스스로 엄지공주가 되었다

원작 엄지공주  


한순간의 사건 하나로 내 인생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날을 원망하지는 않지만 만약 다시 한번 나에게 그날을 마주하라 한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엄지공주가 되는 선택을 할 것인지 새로 얻은 목숨으로 새 인생을 살아갈 것인지...

하지만 나는 스스로 엄지공주가 되었다. 이 선택이 잘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혼자 일 때보다 웃는 날이 많은 건 사실이다.


무더운 여름날, 평소처럼 알바를 위해 긴 머리를 질끈 묶고 새로 산 여름 샌들을 신으며 집을 나섰다.


편의점 알바 교대시간이 20분 전이었고 항상 이 시간에 집을 나서서 편의점에 도착하면 오후 6시가 된다. 편의점으로 가는 길에는 몇 가지 지나쳐야만 하는 가게가 있는데 그중 한 가게는 중년의 부부가 운영하는 전당포 가게이다. 한 평 남짓한 가게 안에는 항상 뭐가 그렇게 좋은지 큰소리와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그 앞을 지나가면 꼭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는 타임머신을 타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게 된다. 주변의 상가들은 전당포 가게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한없이 초라하고 쓸모없어 보이게 만든다. 전당포 가게의 시작과 끝을 발자국으로 재 본 적이 있다. 하나.. 둘.. 셋.. 타임머신을 타고 이상한 나라에 들어갔다 나오면 여섯.. 일곱.. 여덟..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발가락과 발뒤꿈치를 길바닥에 대고 맞대며 천천히 걷는다. 숫자를 세면서 그 앞을 지나가는데 정확히 열 발자국이 나오는 게 아닌가. 전당포 앞을 지나가면 딱 열 발자국만큼의 다른 세계로 들어갔다 나온다.


“우리 지누 어딨나? 엄마는 도저히 못 찾겠어”

“아빠도 못 찾겠다 꾀꼬리!”


전당포 앞을 지날 때면 지누라는 이름을 꼭 듣게 된다. 지누.. 엄지누.. 그녀인지 그 일지 모르는 이 이름의 주인은 과연 누굴까? 그리고 매일 누군가 내 이름을 정성스럽게 불러준다는 건 어떤 기분이 들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나에게는 부모가 없다.


“엄지누! 누가 이거 만지라고 그랬어? 그러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엄마, 아빠 속상하게 할래?”


전당포 앞을 지나가면 늘 중년 부부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었고 지누의 목소리는 단 한 번도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느새 내 마음 한편에는 지누에 대한 궁금증인지 부러움인지 알 수 없는 호기심이 자라나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편의점에 도착한 시간은 정확히 5시 55분. 5분 안에 인수인계를 받은 후 나는 편의점 주인이 갖다 놓은 꼭두각시 인형처럼 계산대에 서 있는다. 편의점 주인은 여사장이지만 늙고 마치 시골 쥐처럼 생겼다. 을인 입장에서 굳이 좋게 포장하고 싶지는 않다. 그녀는 자상한 듯 배려 있는 얼굴 뒤에 사리사욕을 정확히 따지는 무언가가 있다. 대게 편의점 알바의 꿀은 유통기한이 갓 넘은 냉동식품들을 먹는 건데 그녀는 나에게 유일한 기쁨을 항상 빼앗아 간다. 가끔 혼자 먹기에 많은 양의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들이 나오면 한두 개는 주기도 하지만 모두 싸가지고 어디론가 가버리곤 했다.


그녀가 편의점에 들르는 시간은 아르바이트생들이 교대하고 난 후 가장 느슨해질 때쯤이고 깜박 졸음이 오기라도 하면 된통 혼이 나기도 한다. 어김없이 편의점 안에서 유리창 밖을 바라보는데 그녀가 오고 있는 게 보인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다.


“김아, 너 애인 없다고 하지 않았어? 우리 집 옥탑에 사는 총각인데 오다가 만나서 이야기해보니까 괜찮더라. 공무원 준비 중이래. 얼마나 좋아. 공무원 되면 김이 너는 인생 꽃길이야”


세상에, 이제는 하다못해 갑질에 이어 내 연애도 개입을 하려나 보다. 못 된 시골 쥐 같으니라고! 두고 봐라 맞은편 상가에 편의점만 들어오면 바로 옮기고 만다. 기필코! 옥탑방 고시생은 무심한 듯 컵라면을 고르는 척하더니 나와 눈이 마주쳤고 언제 봤다고 힐끔 고개 인사를 건넨다. 내가 받아주지 않자 그새 그걸 본 시골 쥐는 내 옆구리를 꾹꾹 찌르더니 인상을 팍 쓰는 게 아닌가. 나는 어쩔 수 없이 눈인사를 하고 냉장고에 음료수를 채우겠다며 창고로 들어갔다. 창고 안에서 음료 냉장고에 빈 음료 칸을 채우고 있는데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들어왔고 과자를 고르는 걸 음료 냉장고 뒤편에서 보고 있었다. 한 칸만 채우고 나가려는데 갑자기 굉음이 들리더니 지진인가 싶을 정도로 건물이 흔들리면서 주저앉아 버렸다. 정말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온 몸이 아파왔다. 사고인가? 지진이면 피해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고 분명 머릿속으로는 도망가야지 생각했는데 다리가 떨어지지 않아 눈물이 났다. 그리고 내 눈물 사이로 보이는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그중에 편의점 밖에서 울부짖는 전당포 노부부가 보였다.


사고였다. 9시 메인 뉴스에도 나올 만큼 큰 사건이라고 들었다. 냉동차를 훔친 고등학생이 운전 미숙으로 편의점을 들이박은 것이다. 편의점 안에는 나와 사장님과 고시생 그리고 엄지누가 있었다. 그중에 생존자는 나 한 명뿐이었고 나는 편의점 뒤에 있는 창고에 들어갔기 때문에 살 수 있었다. 모두가 한날한시에 같은 사고로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엄지누 역시..

처음 그 아이를 봤다. 그 아이가 엄지누였다면 신중하게 고른 과자를 계산대에 올려놓았을 때 나는 속으로 말했겠지.


‘난 네가 참 부럽다, 애야’


사고 보상금은 꽤나 컸다. 내가 편의점에 갇혀 시골 쥐의 꼭두각시처럼 사는 몇 달보다 그날 하루 그 사고에서 살아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가 가질 수 없는 큰돈이 내 손에 들어왔다. 이런게 인생역전이라는 건가? 복권이 당첨되면 이런 기분일까? 아니면 나는 이제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벼락부자가 된 건가? 그런데.. 왜 이렇게 기쁘지 않지? 돈 때문에 그동안 매일같이 편의점으로 향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왜 이렇게 마음 한구석이 아리고 답답할까.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서 일까?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전당포 노부부를 본 적이 있다. 지누의 장례식을 먼발치서 바라보았다. 너였구나. 네가 엄지누였니? 작은 체구의 예쁜 네가 되고 싶었는데... 지누는 13살 나이에 노부부의 곁을 떠났다. 사람들 말로는 정말 귀하게 얻은 딸이라서 금지옥엽 키웠다 했으며 사정을 모르는 누군가는 어디서 입양해 온 딸이라는 말도 늘어놓았다.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한가. 지금 저 노부부는 엄지공주를 잃었고 슬프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신비한 타임머신을 탈 수가 없다.

그때 장례식 밖을 서성이던 나를 발견한 노부부는 나에게 다가왔다. 나를 아는 눈치인 듯 보였다. 그들이 나에게 말해 준 이야기는 놀라웠다.


“학생도 많이 힘들었을 텐데..그래도 이렇게 살아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다리는 괜찮아요?”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꿈을 꿨던 것 같다. 내 튼튼한 두 발로 엄지누의 장례식에 걸어온 건 줄 알았는데.. 노부부의 말에 꿈에서 깨고 말았다.

나는 두 다리를 잃었고 내 두 다리 대신에 휠체어 바퀴가 다리 역할을 해주었던 것이다. 이게 뭐야... 정말 이게 뭐냐고...

난 그날 처음으로 나를 위해 울었다. 그리고 노부부에게 울며 말했다.


“도와주세요...”


그렇게 나는 스스로 엄지공주가 되는 기쁨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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