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tial Climb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 즉 전인류가 동포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이념은 아름다워보이지만, 실상은 허무하다. 왜냐하면 나의 오감을 통해 느낀 직관적인 감상을 배재하고 모두를 사랑하라는 의미로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상적으로는 개인, 국가, 종교간의 이기심을 버리는 박애주의 개념의 사해동포주의가 나는 매우 바람직하다고 보고 스스로 칙유를 내린 것과 같이 실천하려 노력한다.
어느 날 밤의 취객은 내게 작은 충격을 일으켰다.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며 혼잣말도 하던 내 앞에 앉은 그 사람은, 내가 내리는 정류장에서 결국 잠이 깨서는 자신의 정류장을 놓쳤다며 안에 사람들을 비집고 급히 내렸다. 불쾌하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그 장면은 단순한 에피소드로 끝날 수 있었겠지만, 그를 내 마음속에는 더 깊은 물음으로 남았다. 왜 나는 그를 '무례한 취객'으로만 각인하려 했을까? 왜 그의 행동을 보고 '무책임한 사람'으로 재빨리 평가하려 했을까?
당시 내 눈에 보인 특정 인물의 행동에 의해 평가는 당연히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우리는 평가를 내리는 것에 굉장한 주의와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타인을 만날 때마다, 몇 가지 눈에 띄는 행동으로 그 사람의 전체를 규정짓곤 한다. 덤벙대는 친구를 20년 후에도 여전히 덤벙대는 사람으로 보는 것처럼.
하지만 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한 사람을 '한 가지 성격'으로 묶어 생각하는 데 익숙하다. 착한 사람, 나쁜 사람, 친절한 사람, 무례한 사람. 이런 한 가지의 잣대를 가지고 내리는 이분법은 편리하지만, 허무하다.
예를 들어보겠다.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동네 사람들에게는 매번 마을을 위해 선행을 하고 착하게만 보였던 사람이 아무도 몰래 애완동물을 죽인다거나, 아주 고약해 보이는 어른은 말없이 오랫동안 일관되게 기부를 했다거나 하는 앞 뒤가 다르거나 인간의 복잡성을 나타내는 사연들을 종종 접하곤한다. 더 구체적으로 예시를 들어보겠다. 걸음이 느린 어르신을 위해 횡단보도를 건널 때 같이 조심히 걸어가주는 사람의 해당 선행이 어느 유튜버에 의해 알려지고 그 행위에 대해서 정의롭고 아름다운 인터뷰까지 한 사람이 있다. 그렇지만 그도 그 선행을 하는 순간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질풍노도의 시기에라거나, 철이 들고 난 이후에도 도둑질이나, 폭언이나, 쓰레기를 땅에 버리거나, 술에 취해 실수를 하는 일이 있을 수 있고, 이면에 어떤 사람이 남아있을지 모른다는거다. 물론 사회적으로 그 선행이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을 주어서 옳은 방향으로 갈 수는 있지만 절대적 성역을 스스로 쉽게 설정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이 모순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그 취객도 마찬가지다. 그는 술에 취해 소란을 피웠지만, 어쩌면 그날 직장에서 힘든 일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늦은 밤까지 일하고, 피로에 지쳐 버스에서 졸았을 수 있다. 그의 '덤벙댐'은 일시적인 실수일 뿐, 그의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이런 복잡성을 무시하고, 눈앞의 행동 하나로 사람을 재단한다. 하지만 악인과 선인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취객이 버스에서 내린 직후에 벌어진 일은 이러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내려서 오랫동안 길을 가다가 취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할머니가 위험하게 끌고 있는 리어카 뒤로 가서 밀어주는 것이였다. 그러면서 "여기 차 많이 와요. 조심하세요"라고 중얼거렸다. 지나쳐간 버스 안의 사람들은 그의 소란스러운 하차 때문에 이미 그를 '귀찮은 취객'으로 평가했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그의 선행이 보이지 않았거나, 보이더라도 취한 상태의 우발적 행동으로 치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소란을 피운 사람으로 각인된 채, 그들의 평가는 부정적으로 고착되었을 것이다. 반면, 그의 선행을 직접 목격한 나는 그를 단순한 '무책임한 취객'에서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재평가했다. 그 순간, 내 시선은 그의 모순된 면인 1)취한 무질서함과 2)숨겨진 선함을 관측하였고, 더 균형 잡힌 이해로 나아갔을 수 있었다. 이러한 클리셰 범벅된 나의 경험은 같은 사람의 행동도 맥락과 관찰자의 시야에 따라 평가가 극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명확하게 보여주곤 한다.
이러한 무조건적인 깊은 이해는 사고하는 사람을 몹시 피곤하게 만들지만,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습속 중 하나인 얀테의 법칙으로부터 관점을 이어가보면 조금 더 충격적으로 간편할 수 있다.
1.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2. 당신이 남들보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3. 당신이 남들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4. 당신이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마라.
5. 당신이 남들보다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
6. 당신이 남들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7. 당신이 모든 일을 잘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8. 남들을 비웃지 마라.
9. 누군가 당신을 걱정하리라 생각하지 마라.
10. 남들에게 무엇이든 가르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마라.
즉, 나는 누구보다 특출나게 월등하지도, 열등하지도 않다는 의미이고, 자신에게는 과신과 자만을 주의해야하고, 상대방에게는 공동체적 사고를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지식에 대한 회의 주의, 자아의 한계와 무상함에 대해서도 말한다. '당신이 뭔데 상대방을 쉬이 평가하는가?' 라는 의미다.
고로, 누군가를 평가하려면 깊은 관심이 필요하다. 한두 번의 만남으로 끝나지 말고, 시간을 들여 그 사람의 맥락을 탐구해야 한다. 덤벙대는 친구의 뒤편에는 다른 집단에서의 다른 평가가 있을 것이다. 나 자신의 모순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하면, 타인에 대한 평가도 더 공정해질 수 있다. 이는 실천적인 조언이다. 다음에 누군가를 판단하려 할 때, 멈추고 물어보라. "이 행동 뒤에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그러면 우리의 평가는 더 이상 얕은 각인이 아닌, 진정한 이해로 나아갈 것이다. 이 길은 허무할지 몰라도, 그 끝에 진짜 사해동포가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