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통고 동문들께 감사를 전하며
< 안방 소파 위 퀼트 무릎 담요: 포근한 헥사곤 조각 이불>
며칠전, 2002년에 방송통신고에서 담임과 학생으로 만났던 동문들과 저녁 모임을 했다. 처음 핸드폰이 울렸을 때, 화면의 '방통고 춘자씨'라는 글자를 내가 잘못 읽은 줄 알았다. 막 가슴이 뛰었다. 이런 일도 있구나! 생각나면 전화벨이 울리는구나! 집안 일로 속상하고 우울한 일이 있어서 속에 든 화(火) 기운 뺀다고 무작정 여수로 날아가 바다를 보며 내 신세를 한탄하고 있을 때 였다. 목소리 그대로, 20년을 날아간 듯 내 마음의 영웅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일반고등학교 안에 또 다른 학교의 형태로 존재하던 방송통신고등학교는 일요일에 수업을 하기 때문에 주중에는 일반고 교사로, 주말에는 방통고 교사로 근무하는 일은 지금은 상상도 못하는 고강도 업무였다. 그 당시에는 사명감 하나로 똘똘뭉친 교사상을 강제로 주입 당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던 시절이었으니 내가 원하는 담임은 아니었으나, 나는 (남들이 모두 꺼리는 일요일 근무와 수업을, 순전히 젊다는 이유만으로? 아니면 하나님 백으로도 안되어?) 묵묵히 어르신들의 담임이 되었다. 나는 평범하고 꽤 순탄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교편을 잡고, 20대 후반에 결혼을 하고 당시 3개 정도의 학교에서 이미 근무한 경험이 있는 경력 10년이 넘는 평범한 중견(?) 교사 였는데, 어렵게 어렵게 간신히 얻는 아이가 5살이 되던 해, 남들은 월드컵으로 나라 전체를 들썩이게 방방 뛰던 시절,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대학병원에서 생사를 넘나들고 있던 때라 나는 인생 최고 레벨의 암울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방송통신고도 일반고와 똑같이 체육대회, 수학여행, 방학 등 커리큘럼은 동일했기에 우리는 체육대회가 있는 날은 대전에 가서 충남 전체 방통고 연합 체육대회를 했으며, 수학여행은 다른 학급과 함께 가서 밤을 새워 가며 이야기꽃도 피우고, 고기도 구워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거의 나보다 연령으로 보나, 살아오신 연륜으로 보나 어르신들이었고,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한 분이나 졸업을 못하신 분들도 중고등학교 교복을 못 입어보고 눈물을 삼켜야 했던 그 가슴에 맺힌 학업의 한을 풀게 되었으니 주중에는 모두 생업에 종사하시면서도 일요일에는 지각한번 없이 수업을 받으시던 분들이었다. 얼마나 눈을 반짝이며 수업과 각종 행사들에 열심히 참여하시는지 젊은 나는 집안 우환과 자기 연민은 개나 줄 판이었다.
그분들의 살아오신 과정들을 들어 보면, 모두 살아 있는 위인전의 위인들이었지만, 그 중 제일 기억나는 몇분이 계신데, 70이 되신 할머님과 중년의 남매였다. 함께 우리반의 학생이 된 누나인 춘자씨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남동생은 아직 미혼인 노총각 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순하고 착실함 그 자체인 노총각을 우리반의 반장으로 선출을 했는데, 부끄러워하고 나서지 않는 성격이었으나 얼마나 예의 바르고 성실한지, 우리반은 한마음으로 그를 장가보내기 준비 위원회까지 결성을 할 정도였다. 내가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고 그 분들도 졸업을 한 후에, 한 두어 번 만난 적은 있으나 거의 20년 가까이 만나기 어려웠다. 그래도 나는 그분들의 011, 016 전화번호 하나도 지우지 않았으며 내 핸드폰을 몇차례 교체할 때도 내 전화번호 만큼은 절대 바꾸지 않았다.
마음 한 구석이 늘 그리웠다. 70대 할머님은 우리 엄마와 연세가 한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는데, 얼마나 자식같은 우리반 학생들과 나를 담임선생님으로 깍듯하면서도 따뜻하게 대해 주셨는지 정말 보고 싶었다. 그 당시 과수원의 주인으로, 그 힘든 일을 하셨는데, 내 아이가 어린시절, 과수원의 사과나 배 열매를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도 주시고, 손녀와 나이가 같아서 더 귀여워 해 주셨다. 그 할머님이 이제 90을 앞두고 계신다. 또한 어린나이에 부모를 잃은 4남매의 맏이였지만 언제나 환한 미소로 부모 역할까지 마다하지 않던 춘자씨는 이제 손자까지 있는 할머니가 되셨다. 그녀는 여전히 이쁘고 성실하게 세상을 살며, 나를 잊지않고 우리반과 이어주셨다! 춘자씨 동생인 우리반 반장님은 이제 전기기사 사장님이 되셨단다. 늦은결혼 후 낳은 딸이 벌써 수능을 쳤다고! 세월이여!~
내가 방통고 우리반 어르신들께 느끼는 나의 감정이나 추억담을 모두 글로 표현하기 어렵고 할 수 없을 것이다. 2002년 당시 우리는 퀼트의 조각 천처럼, 작고 눈에 띄이지 않는 존재들이었을지 모른다. 각자 다른 무늬, 다른 색, 다른 질감을 가진 삶을 살다가 방송통신고라는 한 장소에서 잠시 이어진 인연들이었다. 30대부터 70대까지 늦깍기 고등학생이라는 공통점 하나로(국민학교, 중학교를 검정고시로 패스하고 오신 분들이 대다수 였다) 묶였던 얼굴들, 신기하게도 그 분들의 숨결, 웃음결은 그대로 였다.
퀼트가 그렇듯, 반듯한 새 천만으로는 아무런 작품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누구도 반듯한 새 천(원단) 인 적이 없었다. 자투리였고, 홀로 남겨진 채 내 역할을 찾아 들어갔고, 그래서 더 손이 바빴으며 작으니 더 모여야 했다. 빠듯하고, 홀로 빛나는 시절이 없었던 것 같고, 남들보다 더 늦었고, 돌아가야 했던 날들을 잇고, 붙이고, 그러면서도 결코 다른 이를 배척하지 않았다. 주어진 색깔대로, 생긴 모양대로 받아들이고 (솜으로) 채우면서 누군가의 시린 무릎위나 움추린 어깨를 덮어줄만큼 충분히 따뜻하게 온기를 만들어 온 분들이다.
시스틴 성당의 천지창조(미켈란젤로가 성당 천장에 그린 그림. 그 유명한 하나님과 아담이 서로 손가락 끝을 닿을락 말락 하는 그림도 그 중 하나.)만이 명작인 것은 아니다. 천안중앙고 방통고 2학년 3반 우리반은 내 방 의자에 놓인 헥사곤 담요처럼 조각들을 서로 밀어내지 않고, 모난 부분을 잘라 버리지도 않았으며 불완전한 빈자리까지도 서로 채워주며 하나씩 연결되어 스스로뿐만 아니라 모두를 감싸 안아 줄만큼 우리 모두의 포근한 명작이 되었다. 우리 나라의 빈자리, 찢어진 자리, 빛바랜 자리까지도 모두 안고 채우고 자신의 슬픔은 안으로 삭히면서도 타인의 눈물도 닦아 줄만큼 넉넉한 분들이었다. 그 분들이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 대한민국의 현재를 창조한 작은 영웅들 이었구나. 이순신 장군의 그 멋진 거북선도 그 배를 노젓던 수군들, 이름도 명예도 없던 그들의 손과 허리와 어깨가 있기에 결국 승리를 이루었듯이, 현재 우리가 있는 지금 이곳은 수많은 할머니와 춘자씨와 반장님과 남순언니와, 명희 언니 그리고 주성씨가 계섰기에, 그리고 그들이 노를 놓지 않았기에 우리 모두가 존재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퀼터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이제 나는, 헥사곤으로 모이고 이어온 우리반을 안쪽에서 보이지 않게 이어 붙인 바탕천과 퀼팅(바느질, 홈질)같은 존재로 남고 싶다. 내 인생의 가장 암흑기, 그 분들은 점심 도시락 하나도 넉넉하게 10인분은 족히 될만하게 푸짐하게 준비해 오셔서 정규고등학교에서 퇴학 당하고, 뒷편에서 잠만 자다가 도망갈 기회만 엿보던 (내 눈에는 절대 이쁘지 않았던 문제아 들 같아 보이던) 반항끼 가득한 우리반 청년들까지도 따뜻하게 품고, 배려하던 분들이다. 그 분들을 통해 나는 누군가의 하루를 조용히 지탱해 주는 일이 얼마나 의미깊고 중요한 일인지 직접 배웠다. 이제 나는 역할을 바꾸어, 그 분들을 내 인생학교의 담임 선생님으로 모시고 내가 좋은 학생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한다. 더 늦기전에 그 배움을 실천해 보아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