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내 인생을 흔든 사나이, 그리고 솜뭉치 미로
월요일 오전 9시 15분. 사무실의 공기는 주말의 온기를 채 회복하기도 전에 차갑게 식어 있었다. 강민후 팀장은 모니터 너머 예인 씨의 뒷모습을 힐끗 보았다. 방금 전 나눈 대화의 잔상이 가시처럼 목에 걸려 있었다.
“예인 씨, 이 마케팅 기획안 말이에요. 지난번 가이드 준 대로 수정된 건가요?”
“팀장님, 이제 막 출근해서 컴퓨터 켰는데 이걸 지금 바로 확인하라는 말씀이세요? 그리고 이 부분은 원래 제가 담당이 아니었던 걸로 아는데요.”
“아니, 담당을 따지기 전에 팀 전체 흐름상 예인 씨가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주말 사이에 고민 좀 해봤나 싶어서 물어본 거예요.”
“지금요? 월요일 아침부터요? 제가 꼭 이 시간에 이걸 붙잡고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다른 급한 루틴 업무도 많은데.”
‘제가요? 지금요? 왜요?’
요즘 리더들 사이에서 괴담처럼 떠도는 공포의 ‘3요’ 공격이었다. 민후는 순간 뒷목이 뻣뻣해지며 화딱지가 치밀어 올랐다.
‘나 때는 팀장이 시키면 밤을 새워서라도 해오는 게 예의였는데….’ 하지만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여기서 한마디 더 했다가는 당장 내일 아침 사내 블라인드에 ‘꼰대 팀장의 업무 가스라이팅’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올 게 뻔했다.
“강 팀장! 얼굴색이 왜 그래? 또 애들한테 당했어?”
그때, 칸막이 너머로 마석대 팀장이 비죽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민후의 입사 동기이자, 이 구역에서 가장 미친 X로 불리던 악명 높은 리더였다. 성과면에서는 곧잘 좋은 평가를 받았고 나보다 한 해 먼저 팀장을 달기도 했다. 마 팀장은 제 집 안방인 양 민후의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으며 낄낄거렸다.
“강 팀장, 자네는 너무 물러서 문제야. 애들은 처음에 기를 확 꺾어놔야 한다니까? 방금 우리 팀 신입 놈 하는 꼴 좀 봐.”
마 팀장이 자기 팀 쪽을 향해 소리쳤다.
“야! 김 대리! 너 머리는 그냥 장식으로 달고 다니냐? 이 기획안 꼴 좀 봐. 네가 사람이면 이걸 보고 결재해달라고 가져와?여기 좀 봐,너 때문에 내 정수리에 원형탈모 온 거 안 보여? 인마!”
김 대리의 고개가 바닥까지 꺾였다. 사무실 전체가 얼어붙었지만 마 팀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민후에게 속삭였다.
“봤지? 저렇게 쪼아야 정신을 차린다고. 요즘 MZ들? 참을성 없는 건 지들 문제지. 사표 쓴다고 협박하면 쓰라고 해. 헝그리 정신 없는 놈들 데리고 일해봐야 우리만 피곤해. 인사부? 걔들도 꼰대들이라 우리 마음 다 알아.”
민후는 마 팀장의 거친 언사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해지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나도 저렇게 시원하게 질러버릴 수 있다면...'
그날 밤, 녹초가 되어 현관문을 연 민후를 맞이한 건 하얀 털 뭉치, 말티즈 ‘미로’였다.
“왈! 왈왈!”
미로는 평소처럼 꼬리를 흔들며 쏜살같이 달려 와서는 놀아달라고 재촉했다. 자기가 가지고 노는 바나나 인형을 발 앞에 내려놓고 말이다. 민후는 미로를 안아 올릴 기운도 없이 소파에 몸을 던졌다.
“미로야… 너는 좋겠다. 상사 눈치 안 봐도 되고, ‘왜요?’라고 묻는 부하 직원도 없으니까. 마 팀장 말대로 그냥 지질러버리는 게 답일까? 내가 너무 바보같이 사는 걸까?”
미로는 짖기를 멈추고 민후의 무릎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평소보다 깊고 맑은 눈동자로 민후를 빤히 바라봤다. 그 침묵이 마치 “강팀장, 정말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해?”라고 묻는 듯했다.
민후의 시선이 거실 벽에 걸린 낡은 사진 한 장에 머물렀다. 15년 전, 보잘것없는 스펙의 민후를 직접 스카우트했던 ‘진정한 부장’님. 그는 민후가 실수로 거래처를 날려 먹었을 때도 소리를 지르는 대신 조용히 옥상으로 데려가 커피를 건넸었다.
“민후야, 내가 널 왜 데려왔는지 알아? 넌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알고 싶어 애쓰고, 상사의 말을 진지하게 적었지. 야근을 하더라도 그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2시간 일찍 출근해서 하루를 준비하는 그런 친구잖아. 리더는 말이야, 사람을 깎아내리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숨겨진 인생을 흔들어 깨워주는 사람이어야 해.”
그 따뜻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자, 마 팀장의 독설로 가득 찼던 민후의 마음이 조금씩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민후는 떨리는 손으로 노트북을 폈다. 그리고 새 문서 상단에 굵은 글씨로 제목을 적었다.
<리더십, 화딱지를 넘어 사람에게로>
미로는 민후의 손등 위에 조용히 앞발을 올렸다. 아무 소리도 없었지만, 그 하얀 침묵 속에 민후가 가야 할 길의 실마리가 숨어 있는 듯했다.
� 미로의 한마디: "강팀장, 마 팀장 같은 독설은 쉽지만, 진정한 부장님 같은 울림은 어려워. 하지만 쉬운 길은 결국 벼랑 끝으로 연결되더라고. 사진 속 부장님이 왜 그토록 강팀장을 믿어줬는지, 그 '이유'부터 다시 찾아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