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미지근했던, 그것 또한 사랑이었음을

나를 첫사랑이라고 말했던, 그의 결혼 소식을 듣게 된 날

by 스템텔라

오늘도 치열했다, 수고했다!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퇴근 후에 제일 빨리 한 것은 소파에 누워서 배달앱에 들어가 빛의 속도로 치맥을 주문하는 것이다. '소확행'이라고 했던가, 닭다리와 맥주 한 모금의 콜라보를 만끽하면 오늘의 스트레스는 치킨의 눈꽃 소스가 녹듯이 사르르 사라지는듯했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오늘의 행복'을 느끼고 있던 찰나, 방해꾼의 전화가 걸려왔다. 두더지였다. 그는, 중학교 2학년과 3학년 때 2년 연속으로 같은 반이면서 서로 '형 아우'라고 부르며 전우처럼 지내온 친구이다.

다짜고짜 하는 말이 "야! 결혼한다."이길래

"야, 너는 진작 결혼해놓고 뭔 또 결혼? 재혼하냐?"라고 물었더니 "아니, 명진이(가명), 소식 못 들었어?"라고 도리어 나에게 되묻는데 순간 먹던 맥주캔을 잡고 있던 손가락의 힘이 쭉 빠지면서 머리가 멍해졌는지 두더지의 뒷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리고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이 똑딱거리며꾸로 가듯이 나도 잠시 망상에 잠겼다.


14년 전, 유난히도 뜨거웠던 여름날

나는 명진이에게 이별을 고했다.

"너에게 내가 뜨겁지가 않아, 내 마음이 미지근한 걸 어떡하니?"

백합꽃처럼 흰 피부를 가졌던 그는, 영혼도 투명하리만큼 맑아서 동화 속 어린 왕자가 꽃을 대하듯 내게 항상 세심히 신경 쓰고 보살펴주었다. 그런 천사 같은 친구에게 나는 매몰차게 이별을 고했고 급기야 눈물이 맺힌 모습을 본 나는 냉정한 표정으로 뒤돌아 황급히 집으로 와버렸다. 그 순간,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다중인격을 발휘하여 남자를 위해서 보내준다는 희대의 잡소리와 함께 착한 여자의 탈을 쓴 나쁜 여자 콤플렉스가 발휘하고 만 것이다. 과거로부터 혼자 쌓여왔던 피해의식이 스스로 극복이 되지 못한 채 내가 도무지 견딜 수 없어서 관계를 끝내버리고 말았다. 나는 '명진이는 단지 내가 처음 사귄 여자 친구라는 이유로 나에 대한 감정이 당연히 클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혼자 합리화를 해버리고는 그를 놓아준 후에도 일부러 떠올리지 않았다.


명진이는 당시, 중학교 2학년 때 나와 같은 반 동창이었다. 당시에 나는 중2병이 심하게 걸린 나머지 청개구리 같은 행동으로 소위 말하는 사고뭉치의 삶을 무한 반복하며 쌓인 벌점을 없애려 수업시간에 청소하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희한하게도 그때는 '범생이'라고 불리는 애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묘한 증상이 발생하고는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반 친구들이 갑자기 어떤 남자애를 손으로 가리키며 자기들끼리 수군대는 내용을 듣게 되었다. "쟤는 얼굴도 귀엽고 성격도 좋고 공부도 전교 1등인 데다가 체육도 잘해. 못하는 게 없어"라면서 우상화 수준으로 칭찬을 하는데 처음에는 '뭔 순정만화 주인공도 아니고, 뭐하는 짓이지'싶은 마음에 신경을 껐다. 그런데 왠 걸, 같은 반의 일원으로 생활을 해보니 명진이가 왜 인기가 있는지, 동년배 친구들에게 어떻게 존경을 받는지에 대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차츰 시간이 지나자 나도 명진이와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안 친한 상태에서 갑자기 다가가면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 수업내용을 빙자해 조금씩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가끔씩 말을 걸어보았다. 하지만, 물과 기름이 섞이지 못하듯이, 결국 우리는 친해지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당시에 오해를 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 4인 1조로 조를 짜서 큰 전지에 역사만화를 그려서 제출하는 숙제에 명진이와 내가 같은 조로 편성이 되었다. 그때 나는 무임승차에 편승해서 '명진이 덕에 과제점수를 잘 받았다'는 이야기를 너무 듣기 싫은 나머지, 만화의 그림 수작업을 온전히 내가 담당하겠다고 조원들 앞에서 적극적으로 나섰고, 다행히 직접 그린 그림이 빛을 발해서 우리 조는 반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런데, 막상 우리의 자리로 선생님이 다가와서 하는 말이 '명진이가 그렸구나? 역시 1등 할 만하네'였다. 내 마음은 와르르 무너졌고, 본인이 그린 것이 아니라고 해주길 바랬건만, 웃고만 있던 명진이에게 느낀 실망감도 큰 나머지 덩달아 상처까지 받은 관계로 그 후에는 그와 거리를 두며 지냈다.


중학교 시절이 지나가고 어느덧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되고 내 삶을 스스로 어떻게 책임져야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하루하루 분주하게 살았던 것 같다. 중학교 졸업 후에 중3 때 친구들과 꾸준히 동창회를 하던 탓에 두더지와는 연락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뜬금없이 두더지가 자기 친구와 셋이서 보자는 연락이 왔다. 자리를 나가고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이후에 연락도 한 적 없던 명진이의 두 눈이 나를 보며 반짝이고 있었다. 이어서 명진이가 내 소식을 궁금해했다는 두더지의 설명이 더 황당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너무 어색한 나머지 내가 아는 유일한 정보로 영혼 없이 말을 걸어보았다.


"의과대학 준비한다는 소식은 다른 친구들한테 얼핏 들었는데, 잘 성사되었니? 하필 아는 소식이 이것뿐이라."

여기에 대해 명진이는 성실히 대답해주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내 인생에 매우 자신이 있었어. 마음먹으면 다 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실패와 좌절을 겪고 나니 깨닫는 게 많더라. 삼수까지 하고서야 내 한계를 스스로 알았지만(웃음) 사수 안 해서 천만다행이지 뭐"


두더지와 명진이가 각별한 친구사이인 줄은 몰랐지만,

두더지는 나이를 먹는 동안에 나에 대한 이야기를 간간히 해왔고, 명진이는 기회가 된다면 나를 한 번 보고 싶어 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중학교 때 비전과 거리가 먼 삶을 사는 듯이 보이던 나에 대해서 훗날에 어떤 진로를 준비하는지를 듣게 된 후에 달라진 모습이 궁금한 나머지 직접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면서 따로 보게 되는 날이 많아지고 결국 사귀게 되었다.


친구에서 연인이 된 후의 시간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나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첫사랑에게는 더 마음을 주려고 노력할 것이고

그 당시에는 그게 전부일 거라고 여길 것이다.

명진이도 남들과 다르지 않았다.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그의 순수성이 나로 인해 훼손되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그래서 그가 충격을 받은 나머지 다시는 나를 찾지 않도록 나의 미래를 함께하고 싶다고 말하는 타이밍에 이 이별을 고하고 말았다.


시간이 흘러서 서로 바쁘게 살면서 각자의 영역에서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할 즈음에 명진이에게서 카톡이 왔다. 페이닥터로 취업을 했고 내가 있는 지역하고 가까운 곳에 있으니 시간 되면 얼굴이나 보자는 내용이었다. 안부 전해줘서 고맙다고 장에 '우린 친구니까'라고 마무리 짓는 그의 말에 마음이 괜찮아진 것 같아 혼자 내심 안도를 했다. 명진이와 친구로 돌아간 후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두더지의 전화를 받고 나서 기분 탓인지 갑자기 쓴 맛이 느껴지는 맥주를 부여잡고 다시 현실과 마주하기 위해 애를 썼다.


너와 내가 사는 세상은 다르다고,

나 혼자 삶의 영역을 구분 짓고 오랜 세월 살아왔고,

나 또한 어린 시절부터 너를 우상으로 생각해 온 나머지

네게 진솔하게 대하지 못했던 나를 스스로는 책망했다.

두 손 꼭 마주 잡고 평생 함께하고 싶다는 고백에 도무지 자신이 없어지고 마음이 너무 무거워진 나머지

너에 대한 온도가 미지근하다고 끓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 짓고 아프게 말해버린 것을 용서했으면 해.

너로 인해 내 시간 또한 아름답게 빛날 수 있었던 것은

네가 나를 첫사랑으로 삼아주어서 인 것 같다.

미지근한 것도 지나 보면 사랑이었는데, 그래도 너를 내 곁에서 떠나보내준 것은 다시 생각해도 너를 지켰던 내 인생에서 최선의 방법이었어. 내가 너에게 좋은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내가 너무 잘 알거든.


행복하게 잘 살아!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순간을 빛내 준 영원한 나의 벗 J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