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연로해져서 80이 넘어가도 60대인 자식에게 "야야~차조심해라"라고 항상 걱정한다는 말이 있듯이, 일상생활을 살아갈 때, 특히 밖을 다닐 때는 더욱 조심성을 가져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느 어머님들보다 소녀 같고 감수성이 극히 예민하신 우리 송 여사님은 항상 무남독녀 외동딸을 자신보다 아끼고 걱정하시는 마음에 성인이 될 때까지 가스레인지 근처도 못 가게 하셨다.(그것이 내가 지금 요리를 잘 못하게 된 원인이라고 탓하는 것은 절대 아님...)
엄마의 좌측 어깨에는 내가 보기엔 괜찮았지만 본인의 기준으로 흉측하다고 생각하는 흉터가 있었다. 엄마는 그 흉터가 외부에 보이는 것이 싫다며 무더위에 반팔 옷도 입지 않았고 매일 거울을 보면서 나에게 많이 흉하냐고 물을 때마다 절대 그렇지 않다고 무한 반복의 대답을 해왔다. 엄마가 어릴 적 예방접종(B.C.G, 옛날에는 불주사라고 불렀다고 들었다.)을 한 후에 피부에 발진이 일어났는지 가려워서 긁었는데 이미 상황이 심각해진 후였고 그 후에 병원을 가도 소용이 없어 마음의 상처가 생겼다고 했다. 그래서 하나 있는 자식은 절대로 몸에 흉터를 만들지 않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고 나는 예방접종도 외부에 보이지 않는 부위를 골라서 맞히면서 노력하셨다.
공자께서 하신 말씀에 身體髮膚受之父母
(신체발부 수지부모)라고 했던가. 신체와 터럭,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라 소중히 여겨야 했던 것을, 난 이미 역대급 불효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열두 살에 경험한 대형 교통사고, 학교에서는 내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에 내가 살던 동네에서 그룹과외가 성행했는데, 학교 어머니들 사이에서 공부를 잘 가르치신다고 소문이 난 분이 계셔서 나도 과외를 하게 되었다. 첫인상만으로도 따뜻하신 분이라는 느낌은 겪어 봤을 때도 그대로 셨고,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분의 교육 노하우를 비롯해서 자상하고 친절하셨던 인품과 중간에 틈틈이 준비해주신 간식시간까지 친구들과 함께 과외시간만을 기다리면서 신나게 공부했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해 질 녘, 어둑해진 하늘이 보이는 새시 유리창에 머리 벗어진 경찰 아저씨 남편의 퇴근 모습을 비추는 것도 일종의 반전 묘미였다.
공부가 끝나면, 또 하나의 낙이 있었는데 과외 집에는 당시 유선 게임기가 있어서 슈퍼마리오 등 각종 게임을 할 수 있었다.(지금 생각하면 나도 참 눈치가 없었다... 과외선생님 자제분들과 노는데 정신이 팔려서 친구들이 다 집에 간 후에도 혼자 게임기를 잡고 앉아있었으니..)
경찰 아저씨가 퇴근한 지 좀 되었는데도 내가 정신이 팔려서 게임을 한참 하고 있다 보니 과외선생님께서 "엄마가 걱정하실 거야. 이제 집에 가는 게 좋겠어."라는 말을 듣고 너무 놀라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서 그 길로 가방을 들고는 냅다 집을 전속력으로 뛰어갔다. 과외 집에서 우리 집은 700m가량 되는 거리였는데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가야 집을 갈 수 있었다. 그날, 나는 집까지 전력질주를 하며 운동회 때 단거리 달리기보다 더 빨리 뛰어서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빨리 집에 도착해야 된다는 생각 하나 만으로.
잠이 들었나?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이지?
꿈에서 깬 듯한 상황에서 어리둥절해서 눈을 떴는데 할머니가 대성통곡을 하고 계셨다. 순간 쨍한 형광등 빛이 너무 눈이 부셔서 불쾌해지고 시선을 내리깔았는데 내 사지가 침대에 묶여있었다. 간호사로 보이는 여성분이 다짜고짜 내 좌측 종아리에 큰 가위를 대고 바지를 무심히 잘랐다. 싹둑싹둑 조각난 섬유 조각들을 냉정하게 쓰레기통에 막 갖다 버리는 모습에 황당해서 "저기요! 이거 엄마가 사준 것 처음 입은 고르뎅 바지인데요 자르면 어떡해요!"라고 소리를 질렀으나 목이 쉬어서 음성이 전달되지 못하고 안에 맴돌았다. 그러고선 내 오른쪽 손을 누가 확 잡길래 소스라치게 놀라서 봤더니 과외선생님이었다. 그녀는 울면서 내게 말했다.
"내가 널 집에 급히 보내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어. 놀고 싶어 하는 것을 왜 굳이 내가... 너무 미안하다."
무슨 상황인지 정신을 차리지도 못한 채로 몸이 묶여 흰 콘크리트 천장 벽만 보이던 찰나, 갑자기 천장이 빠르게 움직이고 순식간에 수술실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후, 나는 3일 차에 회복실에서 깨어났다. 온전히 정신을 차린 것은 1주일 정도 지났을 때인 것 같다. 내 좌측 다리는 온갖 핀과 철심이 박혀있어서 최근까지 뛰어놀던 정글짐을 연상케 했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나는 길을 건너다가 차에 치이는 대형사고를 겪게 되었다는 것을.
횡단보도가 언덕에서 내려오는 비탈길에 있었는데 차가 내려오다가 그만 정지를 하지 못하고 나를 친 것이었다. 그 순간 공중에 붕 떴다가 머리부터 낙하하는 바람에 나는 기절을 했었다고 한다. 병실에 과외선생님과 남편이 자주 와주시고 며칠 후에는 낯선 아저씨까지 함께 나를 보러 와서는 괜찮냐고 안부를 살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낯선 아저씨는 나를 쳤던 가해자였고 CCTV도,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었기에 목격자가 없었더라면 현장에서 나를 두고 갈 심상이라고 했다. 나를 무단횡단으로 몰아서 본인이 조금이나마 감형하려고 했던 것을 과외선생님 남편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서 잘 해결될 수 있었다. 내가 병원으로 이송될 수 있었던 것은 사고 현장 바로 앞에 있던 미용실의 원장님께서 사고 소리를 듣고는 밖에 나와서 상황을 목격했고, 순간 정신이 혼란해져 도망가려는 가해자 아저씨를 붙잡고 내 가방에 쓰여 있던 집 전화번호로 전화해 준 덕분이었다. 너무 감사한 마음에 엄마는 사고 합의 후에 미용실 원장님을 찾아갔지만 이미 미용실은 이사를 가버려서 그분을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고 한다.
함께 과외를 했던 친구들은 병문안을 와서 내가 환자인 모습이 웃겼는지 깔깔대고 웃으며 "5학년 7반 000"이 죽었다고 소문 다 났다. 와보니 잘 살아있구먼"이라고 장난을 쳤다. 그 말을 듣고 열심히 재활해서 보란 듯이 학교를 복귀해야겠다고 결심했다. 4월 초에 사고가 난 후 휠체어를 타고 10월에 복귀를 하는 과정에서 학교 측에서 너무 결석이 많아서 교과과정을 따라가지 못할 수도 있으니 유급을 할 것인지 선택하라고 했다. 당시, 철없던 마음에 1년을 더 쉬면 동생들보다 나이가 더 많은 것이 학교생활이 편할 것 같다고 유급하겠다고 했는데 엄마와 과외선생님이 유급은 절대 안 된다고 뜯어말리며 학교를 못 나간 나의 복습 기간과 앞으로 배울 예습 내용을 가르쳐주시는 것에 매진하며 정성을 다해 복귀를 도왔다. 사고 후유증으로 좌측 발목뼈와 좌측 발이 다 자라지 못한 탓에 다리를 절게 되었지만, 나의 부주의로 인한 대가를 치른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학교로 복귀한 후에 내가 사고가 났던 지점에 횡단보도가 사라지고 50m남짓 떨어진 곳에 육교가 생긴것을 보고 담임선생님께 여쭤봤더니 최근에 안타깝게도 내가 사고가 났던 지점에서 또 교통사고가 발생했고 그 친구는 현장에서 바로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후에 여건이 나아졌다니 한편으로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지나간 일을 돌이킬 수 없음에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글을 쓰다 보니, 고마웠던 분들도 참 많았고 다시금 살 수 있었던 것에 대한 천운도 많이 작용했던 것 같다.
많은 도움을 주셨던 분들이 어떻게 지내시는지 안부가 너무 궁금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보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