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잠시 오춘기

정신은 유년기, 몸만 늙어가는 어른 아이의 소심한 반항

by 스템텔라

밤 11시, 엄마의 일과 중에 가장 컨디션이 좋은 시간대를 골라서 영상통화를 한다. 그런데, 예전부터 앓아오던 우울증이 다시 도졌는지 이틀 간격으로 전화를 걸어도 무응답인 시간이 3주가 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전 같으면 엄마가 무슨 일이 생겼는지 걱정을 먼저 했을 텐데 이제는 이런 상황에도 감흥이 없어진 내가 무서울 지경이다.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다행히도 엄마는 별일이 없다고 했지만 '아무 일 없는데 내 전화를 안 받는다'라고 생각하니 이제는 신경 쓰기도 지친다는 감정과 함께 짜증이 났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유년기에 많이 경험한다는 사춘기를 겪지 않고 그 시기를 무사히 잘 지나왔다고 생각했다. 하나, 불혹을 몇 년 남겨두지 않은 요즘, 나는 사춘기의 다음 단계인 오춘기 같은 시기를 겪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교롭게도 그 화살의 대상은 엄마였고, 심지어 유년기 때는 서로 대화도 없었던 아빠에게 최근에 내가 갖고 있는 감정에 대해 일부 표현을 하게 되면서 더 친해진 것 같다.(전형적인 경상도 남성이라 예전에는 말이 없었건만.. 어쩌면 중년 남성분들이 여성호르몬이 많이 나오시는 시기라고 하여 더 공감을 잘해주시는 것일 수도 있다고 추측해본다...)


부모님이 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무남독녀 외동딸이라고 금지옥엽 아껴주셨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사랑에 대해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해 방식의 차이가 있고 사람마다 방법도 다를 것이다. 나는, 오히려 유년기 때에 엄마를 전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나 세월이 흐른 지금에서야 점점 부작용이 발생하고 말았다는 정신건강의학과의 결과를 접하게 되었다.(진단의 비유가 어른 아이라는 점이 다소 흥미로웠다.)

'한 배를 탔다'는 의미가 물 위를 떠다니는 배를 같이 탔다는 의미이지만, 우스갯소리로 엄마의 배를 타고 나온 자식으로 '배'라고 이중적인 의미로 써본다. 나 또한 선택권은 없었고 엄마의 자식으로 태어나고 자라면서 버림받지 않고 건강하게 잘 키워주신 은혜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다만, 내가 입은 데미지에 대해 어릴 적에 해소되었어야 할 시기에 조치가 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해본다. 상처는 치유되지 못한 채 몸만 커버려서 미성숙한 정서와 자아를 갖게 되었다는 의사의 말이 참 충격적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정신적으로 성숙한 인간형인 양 코스프레를 하고 산 것 같다는 생각에 회의감도 밀려왔다.)


이중성을 가진 그녀와 난, 10여 년동안 암흑의 터널이 지나가길 버티고 또 버텼다.

어둠의 시작은 대략, 초등학교 2학년 경이었는데 학교에서 돌아왔더니 불이 꺼져있어서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 공기가 이상해서 안방을 가보니까 문이 잠긴 채로 안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엄마가 울면서 내게 말했다.


"나는 자라면서 꿈이 컸는데 집안이 망하고 상황은 도와주지 않고 원치 않은 결혼까지 해서 네가 들어서는 바람에 내 인생이 초라해졌어"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뉘앙스를 보아 긍정적인 말은 아니라는 직감은 있었는 것 같다. 당시, 학급에서 1학기 부반장이었어서 엄마가 학교를 자주 왔었는데 집에서 보았던 슬픈 모습과 우울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학교에 참석할 일이 없었던 2학기부터는 증상이 점점 심해지고 큰 병원까지 원정을 다니며 약물치료를 받는 주기가 짧아졌다.

엄마는 나를 기다리지 않은 듯 기다린 이중적인 자태로 나를 맞이하는 듯 맞이하지 않았다. 우울증 중증 진단을 받은 후로 다량의 약을 복용하면서 방문을 잠그고 시체같이 하루 종일 깊은 잠만 잤다. 집은 낮이든 밤이든 항상 불이 꺼진 상태로 깜깜해야 했으며 소리가 날까 봐 까치발을 들고 살살 걸어 다녔다. 그렇지만 식탁 위의 음식을 먹느라 소리가 나는 순간에는 방문이 열리며 히드라 괴물로 변한 기이한 생물체가 쫓아와서는 눈 깜짝할 새에 나를 공격했다. 너무 맞아서 어지러울 정도가 되거나, 혹은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목이 졸리거나, 누가 봐도 머리가 쥐어뜯긴 정도로 습격을 당했다는 정도가 되어서야 히드라는 속이 시원한지 다시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잠을 잤다. 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오죽 아프면 하나 있는 자식에게 이럴까, 감정을 표출할 사람이 나 밖에 없나 보다'라는 불쌍한 생각에 언제부터인가 나를 내려놓기로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매일 밥 세끼 따뜻한 식사를 차려주고 학교 가는 길에 아파트 베란다에서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는 모습도 항상 공존했기에 잠깐 괴물같이 변하는 것은 견디면 시간이 해결해준다고 믿었다. 내가 느낀 그녀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즉, 동정의 감정을 품으면서 하필 내가 갑자기 세상에 생겨나 버리는 바람에 인생의 발목을 잡은 대가로 내가 감수해야 할 부분이 분명 있다고 스스로 믿어왔다.

엄마는 점점 더 난폭하고 날카로워졌으며, 결국 10년 동안 바깥에서 외부인을 만나지 못한 채 깊고 어두운 터널 속에 갇혀버린 나머지 이윽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에 이르렀다. 다행히, 아빠가 빨리 발견한 덕분에 병원에 신속히 이송되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작년 9월, 오랜만에 만난 엄마와 문득 앨범을 보다가 나에게 하는 말이 "난 이때를 떠올리면 지옥 같고 고통스러운 순간의 기억밖에 없는데 사진은 뭐 이리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장면들 밖에 없냐?"길래 나도 대답했다.

"네, 저도 참 힘들었어요. 그런데 행복한 순간은 오랫동안 사진으로 남기고 싶으셨나 본데요?"

"그러니까, 너 아기 때 우리 집에 카메라가 없어가지고 부랴부랴 큰아버지한테 빌려달라 했는데 신상인데도 의외로 아무 말 없이 빌려주더라, 여기 봐라 너 아기 사진 얼마나 많니?"

이어서 그녀는 말했다.

"내가 죽을죄를 지었다. 나는 너에게 지은 죄들에 대해 평생 고통스러워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근데 당시에 나는 눈뜨면 매일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는데 너를 키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지금 와서 네가 나를 똑같이 가해하면 이것은 패륜이잖니(웃음) 나는 너에게 이렇게 사과하고 표현하는 자체도 고통이야. 하지만 용서를 바란다."


공교롭게도 내 오춘기는 그 말을 듣고 나서부터인 것 같다.

나 또한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 한 그녀의 모습을 기대했던 것인지,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난 후로 마음속에 깔려있던, 나는 어릴 적에는 그녀를 이해했다고 착각했지만 나이 먹으면서 그게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오춘기가 찾아온 것이었다. 해결책이 없는 현재 상황에서는 '당분간 나를 좀 방치하고 내버려 두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 스스로의 솔루션을 내리면서.








작가의 이전글그래, 참 잘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