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휴직 1개월 차. 정말 그리던 나의 생활이다.
10년 차 회사원인 나에게 이 휴직 라이프란, 말도 안 되게 행복하다. 물론 그 앞에 ‘육아’라는 단어가 붙는다는 사실은 빼고 이야기할 순 없지만. 육아휴직은 잠시 회사에서의 ‘은지프로’라는 명함을 내려놓고, 오롯이 ‘엄마’라는 명함에 집중하라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회사에서 8시부터 5시까지 정해진 공간 안에서 붙들려 있던 삶에 비해, 지금의 나는 조금은 더 자유롭다. 누군가는 육아는 퇴근도 없고, 제대로 밥 먹을 시간도 없고, 화장실조차 마음 편히 못 가는 전장 같다고 말한다. 맞다. 그 말도 맞다. 하지만 ‘공간’만 놓고 보자면, 회사가 아닌 ‘집’이라는 공간은 내게는 분명 더 편안하다. 요즘은 남편이 퇴근하면 집 정리 싹 하고, 앞치마 두르고 요리를 해서 맞이하는… 왠지 ‘가정적인 아내’가 된 느낌도 든다. 그런 내 모습이 나에게 은근히 만족감을 준다.
이게 나쁘지 않다. 꽤 괜찮다.
이제 나는 회사원이 아닌 ‘OO엄마’를 만나는 것이 더 익숙해졌다. 휴직한 지 한 달밖에 안 됐는데, 사람은 참 빨리도 적응한다. 예전엔 ‘exit 회사’가 꿈이었고, 날씨 좋을 때 점심 먹고 복귀할 시간만 되면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우리가 왜 다시 들어가야 하냐며!” 동료들과 헛웃음을 흘리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날씨가 좋으면 유모차 끌고 나가 커피 한 잔을 들고 천천히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회사에 있을 때는 오히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커리어는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는지, 더 고민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평-온하다.
그런데 또 월급날이 되면 정신이 번쩍 든다.
“아, 들어오는 게 없구나…”
요즘 정말 많은 엄마들과 소통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엄마들의 상자’를 본다.
얼마 전 조금 마음이 복잡했던 일이 있었다.
한 엄마는 임신, 출산, 육아로 커리어를 잠시 내려놓고 오롯이 남편의 월급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그 엄마는 스스로를 ‘엄마’라는 상자 속에 가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절약에 절약을 더하며, 자신에게는 거의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고.
그래도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기 시작하면서 조금의 시간이 생겼는데도, 일을 다시 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하고 싶은 게 딱히 없다고.
그래서 “그래도 알바라도 해보면 어때요~?” 하고 조심스레 말했는데,
그녀의 대답은 “우리 아이가 엄마가 캐셔로 일하는 건 싫어할 거 같아서요… 그건 좀 아닌 거 같고…”
이유는 계속 이어졌다.
나는 그 모습에서 ‘예쁘게 살고 싶었던 마음’과 ‘그 마음을 가둬버린 상자’를 동시에 봤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계속되는 한탄이 마음 아팠다.
사실 나도 이런 걱정은 한다.
언제 다시 복직하지?
아침에 여유롭게 일어날 때, 문득 든다.
‘헉… 다시 회사생활… 할 수 있나 나?’
근데 또 알지. 복직하면 어떻게든 한다는 거.
지금껏 그렇게 다 그렇게 살아왔다.
중요한 건 ‘일’이 아니라 ‘내 목소리’다. 꿈은 자기 내면의 목소리라고 한다. 무조건 적으로 일을 해야한다고 생각은 들지 않지만, 내 '꿈'을 잃어선 안된다는 생각이든다.
“너, 어떻게 살고 싶었어?”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야 한다.
남편의 월급에 완전히 의존하는 순간, 삶은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둘러싸이게 된다. 남편의 월급은 내가 바꿀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영역은 그 월급안에서 어떤 비중으로 사용할지 정도다. 누군가는 그게 만족스럽겠지만 누군가는 그게 만족스럽지 못할 수도 있다. 그 남편의 월급이 만족스럽더라도 본인의 모습이 만족스럽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언제나 ‘나’다.
오늘 친한 언니가 이런 얘기를 했다.
육아맘들의 대화에는 엄마 본인이 없다고.
“남편이 돈을 얼마나 벌어오느냐, 아이가 언제 걷기 시작했느냐, 아이 말이 빠르냐, 엄마가 얼마나 도와주냐…” 그 속에 ‘나’라는 사람은 없다는 거다.
그래서 생각했다.
나를 자꾸 '엄마라는 상자' 속에 가두지 말아야겠다.
가수 ‘린’의 엄마의 꿈이라는 노래가 있다.
“엄마의 꿈은 뭐였어
소녀로 살던 시절에
누구보다 예쁜 아이였겠지”
이 가사를 들으면 마음이 참… 묘하다.
나도 누군가의 딸니까. 나는 안다. 딸은 엄마의 꿈을 응원하는 사람이라는 걸.
근데 엄마들은 말한다.
“나는 너 키우느라 꿈을 포기했어.” 나는 그런 말이 너무 마음 아프다.
엄마의 꿈을 가둔 건 내가 아니라, 엄마가 스스로 만든 엄마의 상자였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핑계’가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나에게 ‘용기'를 낼 동기이고 싶다.
누군가 말했다. “용기의 반댓말은 두려움이 아니라 핑계다.” 핑계가 없는 삶은 곧 용기가 있는 삶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 유퀴즈에서 김성령의 비밀노트가 공개되었다.
그곳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자유란, 책임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책임을 선택할 줄 아는 능력이다.”
나는 지금 시간이 자유로워졌다고 착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짜 자유는 내가 선택한 삶을 책임질 용기에서 나온다.
이 육아휴직의 시간 동안 내 상자가 조금 더 넓어지길.
내가 나를 더 사랑하고 알아가는 시간이길.
우리아이들에게 '엄마의 상자'는 숨 막히는 곳이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 수 있을 만큼 유연한 공간이길.
오늘도 나는 나에게 묻는다.
“너는 어떻게 살고 싶었어?”
내 상자를 조금은 멋지게 선택할 줄 아는 내가 되길 기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