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콰이강의 다리'를 감상하고
계절이 차례차례 다가왔다가 사라진다. 배만 덮고 자도 더웠던 얇은 여름 이불이 선선하게 느껴져 자다가 일어나 봄가을 이불로 바꿔 덮으니 온기가 돈다. 지난주까지 엄청난 더위와 습도가 기승을 부렸어도 마침내 가을은 온다. 계절은 인간이 만든 상상의 질서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대자연의 법칙이다. 인간을 지배하는 상상의 질서 위에 대자연의, 대우주의 법칙이 있다.
그런데 인간은 직접적인 상상의 질서에 더 많은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기도 하고, 죽어가기도 한다. 또 그런 것들로 쉽게 다른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 말한 인지혁명과 농업혁명에서 인간이 상상의 질서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아무렇지 않게 죽였는지 알게 된 거처럼 인류의 통합과 과학혁명의 장에서도 역시 재확인하면서 상상의 질서가 가진 힘을 여러 각도에서 생각하게 된다. 상상의 질서는 개인이나 사회가 만든 생각이고 마음의 작용이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60조의 세포 수처럼 많은 (어쩌면 더 적거나 더 많을 수도) 보이지 않는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생사를 거듭해 오면서 각인된 세포, 태어나 자라면서 주변의 환경과 자신이 보면서 형성되고 저장한 세포, 사회의 법, 질서, 규범, 인습등의 익명의 권위등으로 억눌리거나 부풀어진 세포, 철이 들어 자아를 찾으려고 몸부림치며 저항한 세포, 종교와 철학으로 가다듬어진 세포, 양서와 좋은 우인들에게 영향을 받은 세포, 세월이 흐르면서 굳어진 세포 등등 너무 많은 세포가 얼기설기 얽혀서 어떨 때는 꼼짝 못 하게 하고 때론 거침없이 나아가게 하기도 하고, 자신을 찌그러트리기도, 활보하게 만들기도 한다. (강제의 힘도 만만치 않게 작용)
요즘 고전영화를 ‘상상의 질서’에 초점을 맞추며 보니 의외의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유명한 음악과 제목만 무성하게 듣기만 하고 진작 본 적은 없던 데이비드 린 감독의 ‘콰이강의 다리’(1957년)를 봤다. 요즘 영화처럼 빠른 전개도 아니어서 보는 사이사이 생각할 시간이 있어서 오히려 나한테는 좋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 일본군이 영국 육군 포로들을 이용해 태국 서부의 콰이강 위에 다리(철도다리)를 놓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먼저 포로수용소장인 사이토 대좌가 포로로 끌려온 장교와 병사들 중 장교까지 노역에 투입하려 들자, 영국 육군 중령 니콜슨이 ‘제네바협약’을 들어 이를 거부한다. 사이토는 폭력까지 쓰며 니콜슨을 태양빛이 내리쬐는 돼지우리 같은 임시독방에 쳐 넣지만 절대 굴복하지 않는다. 이때 군의관이 이 둘을 중재하지만 요지부동이다. 이 장면이 영화에서 꽤 길게 나온다. 누가 봐도 니콜슨의 입장이 불리한데 굽히지 않는다. 그가 가진 상상의 질서는 목숨보다 제네바협약이 우선이다. 사이토의 입장에서는 완력으로 얼마든지 죽일 수 있지만 상부로부터 다리를 완성하라는 명령에 살고 죽는 상황이라 자존심을 구기면서 달랠 수밖에 없다. 이 둘의 상황을 중재하는 군의관의 말 “둘 다 미쳤다”라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재밌는 건 니콜슨이 한 달을 저항하다 나와서 군기 유지를 위해 다리 건설에 전력을 쏟다가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장교도 노역에 동원하게 한다는 점이다. 니콜슨의 신념이 대단하다라고 할 참에 이런 모습으로의 전환은 신념이 강한 게 아니었네?라고만 할 수도 없다. 상상의 질서는 때로는 목숨의 위협에도 아랑곳 않기도 하지만, 상황에 따라 너무 쉽게 변하고 무너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변절자라고 하지만 과연 자신은 변절자가 되지 않을 거란 보장도 없다. 그리고 더 재밌는 건 원수 같던 두 사람이 다리 건설에 진심이 되면서 마치 친구처럼 되어가는 모습이다. 이후에도 여러 등장인물들과 엄청난 사건이 발생하지만 이 두 인물만 놓고 봤을 때 인간이 가진 상상의 질서가 얼마나 변화무쌍한 건지 알 수 있다.
역사에는 신념을 끝까지 따라간 사람, 목숨이 중요해 신념을 쉽게 버린 사람 등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 목숨을 버려도 신념을 따른 사람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한 평가 역시 사람들이 만든 상상의 질서다. 변절자들을 옹호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중립의 입장에서 보면 각자가 가진 상상의 질서에 따른 것뿐이다. 영화에서 보면 자기 다리를 다쳐 피가 철철 흘러도 끝까지 자신의 임무(상상의 질서)를 완수하려 하고 적을 쳐부수는 모습들에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온갖 피땀 흘려 지은 다리가 또 다른 영국군의 폭파작전으로 허망하게 부서지고 달리는 철도가 강바닥에 처박히는 모습은 비참하기까지 하다. 그 상상의 질서로 너무 많은 목숨이 허무하게 사라진다. 이때도 역시 군의관은 ‘전쟁은 미친 짓이다. 다들 미쳤어’라고 한마디 한다. 어쩌면 군의관 말이 맞을 수 있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전쟁도 결국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다. 수세기에 걸쳐 마치 인류가 등장하면서 원래 있었던 것처럼 정교하게 상명하복이라는 신과 같은 질서를 부여해 왔다.
상상의 질서를 단순히 바꿀 수 있다. 없다의 차원이 아닌 너무나 복잡 미묘하게 얽혀 있는 게 사실이다. 개인으로도 사회로도 국가나 세계 차원에서도 원래 갖고 있던 걸 죽어라 고수하기도, 버리기도, 새로 만들기도 한다. 중심이 필요하다. 중심으로 두어야 할 기준이 필요하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의 마음과 그 마음이 만들어내서 믿고 있는 환상이다. 시인과 철학자와 역사가들의 과제이자 어느 때보다 해결이 시급하다”
라고 유발하라리가 '사피엔스' 서문에 밝힌 것처럼 마음이 만들어 내는 상상의 질서의 확고한 기준이 필요하다. 그는 인문학을 다루는 사람들에게서 답을 구하고 있다. 여기에 내가 덧붙인다면 종교와 종교가의 역할도 크다고 말하고 싶다. 인간의 행, 불행의 근본 원인을 밝히고 어떠한 주의주장으로 인간을 쉽게 헤치는 게 아니라 인간존중, 인간존엄, 인간의 가능성에 뿌리를 두고 실천하는 고등종교가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고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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