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위에 존재하는 나
감정은 생물이다. 움직인다. 숨도 쉰다. 흔들린다. 분수처럼 요동친다. 그리고 잠잠하기도 하다. 인간은 감정으로 행복을 느끼기도, 불행을 느끼기도 한다. 한시도 가만있지 않다. 눈도 없고 입도 없고 손도 없고 발도 없지만 눈으로 뿜어져 나오고 입을 통해 토해내고 손짓으로 공중을 마구 휘젓기도 하고 발을 이용해 동동 구르기도 한다. 감정은 눈이 되기도 손이 되기도 한다. 이상하다. 있다고 하면 있고 없다고 하면 없다. 감정은 감정의 페르소나도 갖고 있다. 이중적이고 다중적일 때도 있다. 변화무쌍하고 신기한 존재이다. 추악한 면도 있고 숭고한 모습도 갖고 있다. 감정은 통제하면 할수록 더 삐져나간다. 아무리 솥에 넣고 무쇠 뚜껑으로 닫아도 어느새 달아나버린다. 감정은 메마르기도 하고 오아시스처럼 퐁퐁 샘솟기도 한다. 그럴 때 감정은 물의 모습이다. 꽁꽁 숨기고 눌러온 감정은 때때로 폭탄으로 변해 폭발하기도 한다. 그럴 때 감정은 화약이다. 감정이 주체가 안 돼 상대에게 퍼부으면 내가 감정 쓰레기통이냐 한다. 그럴 때 감정은 쓰레기의 모습이다.
감정을 다스리는 자 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다. 감정은 이성이 다스리는 거 같아도 감정을 다스리는 건 결국 감정이다. 그리고 감정은 때로 이성과 뒤죽박죽 된다. 오늘 지인이 감정이 힘들어 나에게 토로하러 전화했다. 그녀가 어제 겪은 상황을 들어보니 나로서는 객관적인 입장이 보였다. 그녀의 감정은 격앙되었었고 ‘나 좀 봐줘요. 나 이렇게 괴로워요’라고 부르짖고 있었다. 거기다 대고 나는 감정보다 이성이 작동되면서 정리를 해주려고 했다. 그러자 중간에 말을 끊고 그녀는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감정에 내 감정으로 다독이는 걸 듣고 싶었을 뿐인데 내 이성이 작동하는 게 못마땅했던 것이다. 나는 해결사가 되려 했다. 요동치는 감정에 잔잔한 감정을 보여줬어야는데, 멀끔하게 생긴 이성이 나서자 엉망이 되고 말았다. 감정의 적수는 이성이 아니다. 감정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 보면 나는 그녀의 상황이 백 프로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다. 아니 될 수도 없다. 그녀는 내가 그녀의 감정에 이입되길 바랐다. 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게 안 됐다. 되기도 어렵다. 이럴 때 시비를 가리기는 어렵다는 걸 알았다. 인간은 타인이 자신의 감정만큼 느껴주길 바라지만 특징상 그렇게 되는 건 쉽지 않다. 감정이 풍부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인간은 자신의 일과 감정만으로도 너무 벅차기도 하고 범위가 그렇게 넓지도 않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데 왜 너는 이것만큼의 감정만 보이냐 하고 따질 필요도 없고, 따지는 건 불필요한 에너지 싸움밖에 되지 않는다. 얼마 전에 내가 감정적으로 힘들었을 때 주변에서 보인 반응의 무심함에 실망한 적이 있는데 그 역시 내 욕심임을 알게 됐다. 그들의 감정이 메말라서가 아니라 그게 인간이 갖고 있는 특징일 뿐이다. 타산지석의 입장이 되니 이해가 된다. 남한테 바랄 필요도 없고 원하는 만큼 되지 않는다고 실망하고 미워할 필요도 없다.
단 노력과 단련을 통해 상대의 격앙된 감정에 가까이 다가갈 수는 있다. 그렇게 다가가는 감정의 훈련은 필요하다. 물론 노력 없이 되기도 한다. 상대와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훈련이 안되면 제한적이다.
‘어머 너무 속상하셨겠어요. 어떻게 참으셨어요? 나라면 견디기 힘들었을 거예요.’
‘그러게 말에요. 얼마나 화가 나던지요. 뭐 그래도 할 수 없죠’
이렇게 하면 좋았을 것이다. 누구나 내 감정을 인정받지 못해 속상하기도 하고 누구나 타인의 감정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아 머뭇거리기도 한다. 그 감정이란 게 꼬리도 있다. 꼬리를 내린다고 표현하기도 하니까.
중요한 건 감정이 곧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은 전부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중요하긴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감정 위에 내가 있다. 내가 감정이라는 생물을 다스릴 수 있다. 다스려야만 한다.
#감정은생물 #감정을다스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