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살아가기 1
저녁을 먹고 현순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은지는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티브이에서는 해외대학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은지는 꼼짝도 안 하고 쳐다보다가 현순이 설거지를 마칠 무렵 티브이를 끄고 현순에게 다가왔다.
현순은 깜짝 놀라 은지를 쳐다보았다. 어린 은지의 눈빛이 또랑또랑 의지를 담아 진지하게 빛나고 있었다.
현순은 이제까지 어리지만 딸에게 ‘안돼’ ‘하지 마’ ‘넌 아직 어리잖아’라는 등의 부정적인 말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하버드를 가겠다고 할 때도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너처럼 어린애가 그것도 머나먼 미국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공부하는 하버드를 간다고 하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잠자리에 누워 딸이 티브이에 나온 프로를 보고 호기심으로 그런 건지 아니면 진짜 가고 싶은 건지 곰곰이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식탁 앞에서 현순은 다시 딸에게 물었다.
“은지야 너 진짜 하버드 가고 싶어?”
“네. 가고 싶어요. 갈래요. 보내주세요.”
눈빛을 보니 어제보다 더 확고한 의지를 뿜어낸다.
“진짜지? 그럼 엄마가 어떻게 갈 수 있는지 알아본다”
“네. 알아봐 주세요. 티브이를 보니 거기에서 공부하고 싶어졌어요. 빨리 가고 싶어요”
은지는 언제나처럼 자기 말을 긍정해 주는 엄마에게 잇몸을 환하게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현순은 저렇게 어린데 어떻게 보내?라는 걱정보다는 시내에 있는 유학원 몇 군데를 돌면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이제까지의 현순의 삶은 그야말로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삶이었기에 아직 어리지만 혼자 유학을 가겠다는 딸의 생각이 결코 불가능하다고만 생각되진 않았다. 그녀는 불가능한 이유를 찾는 시간에 가능한 방법을 찾아다니는 사람이었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중 영어를 원어민처럼 자유자재로 하는 게 기본이자 최우선이라는 말을 듣고 바로 미국으로 보내지 않고 그나마 가까운 싱가포르에서 영어를 배우고 익힌 후 그다음에 하버드를 준비하는 방법을 택했다. 어린 딸이 혼자 살아가기에 싱가포르의 치안이 안전해서 마음이 놓이고 다민족이 공존하지만 인종차별도 없고 인구의 90프로 이상이 영어를 쓰는 환경이라 딱 좋을 거라 판단했다.
“은지야 엄마가 알아보니 싱가포르를 먼저 가서 영어를 확실히 배우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너 싱가포르부터 갈래?”
“아 그래요? 그럼 당연히 가야지 갈래갈래”
한 번도 “No”를 들어본 적 없는 은지는 벌써부터 갈 마음에 설레고 신나서 대답했다. 유학에 대한 모녀의 대화가 이루어진 것은 은지가 초등 6학년 이른 봄이었다. 현순은 부지런히 은지를 유학 보낼 준비로 뛰어다녔다. 남편과 맞벌이를 하고 있었지만 약한 몸으로 해온 재봉 일은 두배로 늘려 일하면서 자금을 최대한 모으고 필요한 물건을 하나하나 꼼꼼히 준비했다. 초록이 반짝거리는 5월 10일 모녀는 싱가포르에서 공부할 학교 수속을 모두 마치고 각각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최대한 많이 들어가는 큰 배낭가방을 메고 싱가포르행 비행기를 탔다.
날씨는 먹구름이 끼고 비가 한두 방울 흩뿌리며 우중충했다.
어린 딸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창가 좌석에 앉은 은지는 비행기가 달리다 떠오르자 신기한 듯 외쳤다.
“와 엄마 저거 봐요. 아파트도 길도 다 장난감처럼 쪼그맣게 보여요. 아 신기하다”
현순은 앞으로 홀로 헤쳐나갈 어린 딸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는데 저렇게 처음 타본 비행기의 소감을 말하는 모습을 보자 더 애처로웠다. 단순히 여행을 가는 거라면 같이 설레며 맞장구쳤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마음이 안타까웠다.
‘혼자 잘 해낼 수 있을까. 남자애도 아니고 여자애인데 내가 너무 무리하게 진행한 건 아닌가. 며칠 만에 다시 오겠다고 하지 않을까. 그래 다시 오는 게 나을 수도 있어. 그게 나을지도 몰라. 자기도 경험해 보고 아직 나이가 어리다는 걸 깨닫겠지. 아냐, 이왕 보내기로 독하게 마음먹었는데. 이게 무슨 생각이야? 나도 참. 아! 그래도 아직 너무 어려.’
기압이 점점 세지는 걸 느끼자 여러 걱정스러운 생각들이 현순을 더 옥죄는 느낌이었다. 그때 창밖을 보던 은지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엄마. 엄마 저거 봐요. 구름 위로 올라오니 흐리던 날씨가 햇빛이 쨍하며 빛나고 있어요. 와! 세상에 해가 여기 잠깐 숨어있었구나”
비행기는 먹구름 아래를 날다가 어느새 위로 돌진해 올라가 있었다. 현순이 창밖을 보니 눈부신 태양과 파란 물감을 풀어놓은듯한 하늘이 펼쳐져있었다. 현순은 깜짝 놀랐다.
‘그렇구나 태양은 흐린 날씨에도 이렇게 빛나고 있었지. 잠시 잊고 있었구나. 그래 이게 다 무슨 걱정이람. 은지는 긍정으로 키운 아이라 잘할 수 있을 거야. 미리 걱정하고 있다니 나답지 않아. 믿어주자. 내 딸의 앞날은 바로 저 태양과 같을 거야’
현순의 걱정과 서운함은 빛나는 태양 앞에서 녹아버렸다. 6시간가량 날던 비행기는 싱가포르 창이공항에 착륙했다. 공항을 빠져나와 은지가 입학하기로 한 학교에서 보낸 차를 기다리는 동안 모녀는 더운 날씨에 눈이휘둥그레졌다. 남국의 활엽 가로수들이 태양빛에 의연히 서 있었다. 싱가포르의 5월은 서울의 한여름보다 더웠다. 모녀는 입고 있던 얇은 재킷을 벗었다. 좀 낫다.
“와 은진아 날씨가 어떻게 이 정도로 뜨겁냐?”
“하하 봄나라에서 갑자기 여름나라로 온 거 같아 좋은데요? 몇 시간 만에 여름이 되다니. 신난다.”
현순은 작열하는 적도의 햇빛 아래 해맑게 웃고 있는 은지를 보고 따라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저만치서 은지가 다닐 학교 이름이 커다랗게 적힌 빨간색 미니버스가 달려오고 있었다.
#12살소녀의유학일기 #싱가포르 #하버드 #긍정 #아름다운모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