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의 90프로는 라면으로
은지의 싱가포르 생활도 어느덧 사 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무던히도 덥고 비가 수시로 오는 적도 날씨에도 조금은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길을 걷다가 갑자기 내리는 비에 깜짝 놀라 허둥지둥 뛰어다녔다. 서울에서는 우산 없이 학교나 밖에 나갔다가 비가 오면 우산 들고 마중 나와주는 엄마가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혼자 뭐든 해결해야겠기에 마트에 들러 삼단으로 접는 우산을 사서 늘 가방에 넣고 다녔다. 은지는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어떻게 해결할까를 먼저 생각하는 소녀가 되어가고 있었다. 마음이 강한 엄마를 닮아서이기도 하지만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다. 학교에 한국인도 있지만 선생님이 엄하게 영어로만 말하라 해서 은지는 더듬거려도 점차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고 시내를 한 바퀴 돌아도 들리는 게 다 영어라 점점 영어가 익숙해졌다.
은지는 더 욕심을 내서 주말 과외도 하고 싶어 했다. 현순은 어린 딸이 하겠다는 건 무리를 해서라도 도와주고 싶어 했다. 작고 가냘픈 몸으로 현순은 보통 해오던 재봉일을 거의 세배로 늘려 16시간씩 일해 번 돈을 딸에게 보냈다. 아직 미성년자라 계좌가 없어 유학 관계자에게 보내면 학비를 제외하고 은지에게 돈을 건네주었다. 은지는 12살부터 목돈을 받아 관리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은지는 주말에도 과외를 하며 영어가 자신의 세포 속으로 스며들게 치열하게 공부했다. 은지는 중국인 룸메이트가 싫진 않았지만 자기만의 공간을 갖고 싶었다. 밤늦게까지 영어원서를 읽고 싶은데 룸메이트는 일찍 자는 편이라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게 답답하고 매일 먹는 음식도 질리기 시작했다. 은지는 9월 어느 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독립할래요. 자취방 구해주세요”
“뭐? 네가 혼자 살겠다고? 아이코 무슨 말이야”
현순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혼자 밥도 해 먹고 할 수 있어요”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닌 걸 느낀 현순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현순은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어떻게 해야 독립할지 방법을 찾았다. 한 번은 딸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녀가 대화했다 하면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된다. 현순은 휴가를 내어 싱가포르로 날아갔다. 수소문 끝에 학교 주변에 한국인 부부가 3층 빌라에서 사는데 세를 놓고 있다는 걸 알았다. 주인아주머니는 은지 혼자 살거라 하니 처음에는 깜짝 놀라더니 자기가 자주 들여다보겠다고 말해 현순은 안심이 되었다.
살아갈 살림살이를 들여놓고 방을 치우자 제법 모양이 갖춰졌다. 현순은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닌가 이게 맞는 건가 싶었지만 은지를 언제까지나 믿어주기로 했다. 밥 하는 방법과 반찬 몇 가지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모르는 건 전화로 엄마한테 물어보라고 했다. 엄마가 떠나고 은지는 앞으로 자기 혼자 살아갈 공간을 둘러보았다. 4평 정도 되는 원룸에 창문으로 싱가포르 시내가 내다보인다. 남국의 뜨거운 바람이 창문으로 들어왔다. 은지는 앞으로 밥도 해 먹고 반찬도 잘해먹어야지 결의한다. 그러나 결의는 하루도 가지 못했다. 학교에서 치열하게 공부하고 집에 오면 녹초가 되어 그냥 침대에 눕고 싶었다. 꼬르륵 소리에 배가 고파 일어나 할 수 있는 건 겨우 라면을 끓여 먹는 거였다. 싱가포르 라면은 한국 라면보다 훨씬 느끼하고 밍밍했다. 대형마트에 가면 한국 라면을 살 수 있다. 은지는 주말에 대형마트에 가서 신라면 진라면등 라면을 잔뜩 사들고 낑낑 거리며 들고 왔다. 그때부터였다. 한참 성장기의 몸에 골고루 5대영양소와는 거리가 먼 탄수화물과 염분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라면을 먹기 시작한 것은. 점심은 학교에서 주는 음식을 먹어 그나마 영양의 불균형은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 아니 그렇다고 믿고 싶었다. 아침도 라면 저녁도 라면 은지는 점점 라면 마니아가 되고 있었다. 새로 나온 불닭은 또 왜 그렇게 맛있는지 전혀 물리지 않았다. 은지는 엄마에게 전화해 오늘 저녁 뭘 먹었냐? 하는 물음에 처음에는 당당히 ‘라면이죠’라고 답했다. 그러나 수화기너머 안타까워하고 걱정하는 엄마의 목소리에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밥과 계란과 김과 김치를 먹었죠’ 은지는 가끔 같은 반에 있는 한국인 친구들과 방과 후 싱가포르 시내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구경하다가 배가 고파오자 친구들이 뭐 좀 먹자고 한다. 은지는 오늘은 라면 외의 음식을 먹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영선이라는 친구가 제안했다.
“나 한국라면 진짜 먹고 싶어. 우리 그거 먹으러 가자”
“...”
은지는 오늘도 라면이구나 싶어 피식 웃는다. 라면집으로 들어간 세 소녀 중 두 소녀는 냠냠 쩝쩝 맛나게 먹는다. 은지는
‘음, 면이 좀 불었군. 내가 더 잘 끓이겠는걸’
은지는 이렇게 말했다.
“얘들아 다음엔 우리 집으로 와 내가 직접 수제 라면 끓여줄게”
12월 드디어 국립중학교 시험 보는 날이 왔다. 은지는 이제 영어가 들린다. 영어를 쓴다. 두렵지 않다. 꿈도 영어로 꾸고 잠꼬대도 영어로 한다. 엄마랑 통화할 때만 빼고는 온통 영어세상에서 산다. 영어가 더 편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싱가포르 청소년들이 들어가고 싶어 하는 꿈의 국립중학교에 당당히 합격했다.
“엄마 나 합격했어요. 이제 싱가포르 국립 중학생이야”
“그래? 아유 우리 딸 수고했다. 잘했구나 해낼 줄 알았어.”
현순은 목이 멘다. 눈물이 맺혔다. 고생한 보람이 있다. 어린 딸이 그 어려운 일을 타국에서 해내다니. 꿈만 같다.
“그래 우리 딸 얼마나 힘들었니? 입학할 때까지 집에 와 있을 거지?”
“네 다음 주에 갈게요.”
“그래 엄마가 맛나고 영양가 있는 음식 많이 해줄게”
“아녜요. 라면 먹고 학교 다니며 공부한 거고 라면 먹고 키도 많이 컸어요. 내 몸의 90프로는 라면으로 이루어진 셈이니까 라면만 종류별로 사다 놔주시면 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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