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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즐리 Jul 16. 2023

이제야 들려오는 영화

이제야 들려오는 영화.


주말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질러진 방을 보고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의자와 책상에 돌탑처럼 쌓아 놓은 옷을 집어 들어 옷방으로 옮겨두고는 일단 바닥 청소부터 시작했다. 도로 주변에 있는 아파트라서 며칠만 지나도 먼지가 뿌옇게 쌓이는 탓에, 얼마 전 정전기 청소포를 주문했다. 청소포 한 장을 뜯어 모니터 위, 스탠드 모서리, 티비장 아래부터 구석구석 청소하고 바닥을 싹 한 번 쓸어냈다. 이불에 베개커버 돌돌이 질까지 하고 나니 어느새 오후 3시다. 더러워진 손을 씻고 보니, 꽤나 길었던 지난 한 달이었는지 손톱이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리모컨을 들어 ‘로맨틱 홀리데이’라는 영화를 틀었다. 이 영화는 아마도 스무 번 이상은 돌려본 것 같다. M자 탈모 초기 정도로 보이는 젊은 시절의 주드 로와, <마이시스터즈키퍼>의 카메론 디아즈, <타이타닉>, <이터널선샤인>의 케이트 윈슬렛, 그리고 <무한도전?> 잭 블랙 주연의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 영화다. 적당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우연하게 만나게 되고, 또 우연히 사랑하게 되어, 서로 영원히 함께 행복하게 될 것 같다는 그런 류의 상업용 러브스토리. 나는 이런 러브스토리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명작을 보면서 작품의 의미를 탐구하거나, 인생의 본질을 논할 필요는 없지 않나. 물론 나도 가끔은 인생을 걷다가 아주 질이 좋지 않은 아픔과 좌절에 넘어질 때면 어떤 의미가 있을 법한 영화를 찾기도 하고, 위로가 부족한 순간에는 내 마음을 복기하는 듯한 음악을 듣기도 하며, 도무지 답을 모르는 답답한 순간에는 책 방으로 향한다. 그렇게 나와 비슷한 처지에서 현명하게 투쟁하는 영화와 음악, 책 속의 주인공들을 보면, 내가 도무지 찾지 못했던 길을 찾아내기도 하고, 또다시 걸어 나갈 힘을 갖기도 하기 때문에.


하지만 서른일곱의 나는, 이제 어느 정도의 해답을 갖고 사는 어른이 된 지도 모르겠다. 그보다는 이제, 이렇게, 손톱을 깎으면서, 가볍고 예상가능한, 굳이 더 깊게 힘써 알아가지 않아도 되는, 길거리를 지나다가 언젠가 한 번쯤 들어본 것 같은 노래 앞을 살짝 스쳐 지나가는 것 같은 그런 익숙함만으로도 대부분의 일상에서의 공백은 충분해진다. 손톱을 다 깎고, 가 낀 발톱도 정돈하고 나서 손바닥으로 바닥을 휘 한 번 저은 다음 티브이를 올려다보니, 남녀 주연배우가 클래식한 분위기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진지한 대화를 하는 장면이 보인다. 예전에는 저런 진지한 대화 속 행간의 한마디 한마디에서 무언가를 찾고, 스스로를 위로했을 나일 텐데. 저들이 방금까지 노총각 하나가 발톱를 빼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지금 저렇게 진지할 수 있을까. 혼자 헛웃음을 친다. 영화가 끝나기 전에 밥까지 다 해치울 생각으로 압력밥솥에 쌀을 씻고 밥을 안쳤다. 내 방에서 주방 쪽으로 들리는 영화 속 주인공들의 웃음소리와 도로 쪽에서 울리는 차 경적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참으로 감정소모 없이 무뚝뚝 하지만, 마음에 드는 주말이다. 밥 다 먹고 영화 끝날 때쯤, 늘 그렇듯이, 집 앞 단골카페로 커피 한 잔 하러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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