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이 각자의 길을 택했을 때 나에게도 선택권이 있었다면 나는 당연히 어머니 쪽을 택하고 싶었다. 하지만 인생은 좀처럼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 법원의 결정대로 나는 아버지를 따라 지난 도시생활을 정리하고, 아버지의 고향인 충청남도의 한 시골로 향했다. 마치 억울한 누명을 쓰고 유배지로 향하듯 질질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한두 달의 여름이 지나면서 내 눈가가 바짝 마를 때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새로운 학교로 입학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당시 내가 배정받은 3학년 7반은 내 기억 속에 조금 특별한 반으로 자리해 있다. 담임 선생님이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별명을 붙여줬는데, 학기 내내 그 별명으로 서로를 부르도록 했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 벤처기업에서 영어 닉네임을 사용하는 것이 대세인데 (글로벌화를 명목으로 출현한 신생 조직문화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리 필요해 보이는 문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관점에서는 당시로서 상당히 진보적인 반 운영 시스템이었다. 다만 별명이 장래희망이나, 스스로 짓는 영어 이름처럼 자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선생님의 독재로 결정된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마치 부모가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듯이, 원하던 원치 않던 한 해 동안 불리게 될 새로운 이름이 생겨버리는 것이었다. 21세기에 이런 탑다운 방식의 시스템이 가능한가 싶지만 당시는 20세기였고, 그곳은 민주주의보다는 보수가 어울리는 시골이었다. 어떤 친구는 예삐라고 불렸고, 어떤 친구는 왕눈이라고 불렸다. 그들이 그렇게 불리는 기분이야 어쨌됐든 예삐는 정말 예뻤고, 왕눈이는 정말 눈이 컸다. 선생님의 작명에는 합의가 필요 없어 보였다. 그녀의 작명법은 일방적이었지만 수용가능한 논리가 담겨있었음은 어린 내 눈에도 분명해 보였다. 반에 들어서서 인사를 하고 나자, 내 별명은 문학박사로 결정됐다. 독서광도 아닌 내가 왜 ‘문학박사’라는 거창한 칭호를 하사 받게 되었을까 생각해 봤다. 아무래도 그때 쓰고 다닌 줄이 달린 보안경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 측면에서 일리가 있었고, 또 누가 나를 박사라고 불러주는 일이 좀처럼 흔한 일인가. 나는 반항할 이유 하나 없이 그 별명을 내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선생님의 손에 운명으로 점쳐진 우리들의 일그러진(?) 모습은 4학년에 올라가기 전 인쇄한 학급문집 <천사들의 합창>에 고스란히 기록되었다.
글을 쓰면서 생각해 봤다. 나는 그때 반항하는 법을 배워야 한 게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살짝 멋져 보였던 문학박사가 아니라, 나는 다른 무엇으로 불리고 싶었다고 말해야 했는지 모른다. 만화가나, 가수가 되어야 한다고 지체 없이 말해야 했을지 모른다. 아니, 그보다 조금 더 전에 지금 내게는 아버지보다는 어머니가 필요하다고 말했어야 했는지 모른다. 지금은 돈보다도 어머니의 따뜻한 품속에 부둥켜 앉겨있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어야 했다. 선택받는 일보다는 원하는 선택을 하는 법을 일찍이 배워야 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선택에는 때로는 반항이 필요하다고, 그게 어려울 수밖에 없는 당연한 일임을 누군가는 아직 영글지 못한 내게 말해줘야 했다. 수용하는 법을 먼저 배웠기 때문에, 내게 찾아온 수많은 기회들을 만져보지도 못하고 놓쳐버린 적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리한 선택만을 받고, 향하고, 도전하는 법엔 인색해졌는지 모르겠다. 그게 언제부터였는지 사실 모르겠다. 그때 그 천사들은 잘 살고 있을까. 나는 그 천사들이 선생님의 소원대로 합창하지 않았기를 바란다. 살면서 누군가를 위해 노래 부르는 법부터 배우지 않았기를 바란다. 날개가 꺾이고, 추락하고, 상처투성이었을지라도 끝내 두 발로 일어서는 법을 배웠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