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인연 긴 여운

by 윤모

동갑내기 친구의 부고가 날아들었다.

영어회화 모임에서 만난 친구다. 지금은 모임이 해체되어 회원들과의 연락이 뜸하던 중, 카톡에서 메시지를 보는 순간 갑자기 머릿속이 껌뻑 정전된 듯 캄캄했다. 싱크대 앞에서 양파 껍질을 벗기던 나는 거실로 가서 소파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녀를 보면 늘 ‘성실’ 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회화 수업에서 과제에 가장 철저했고 젊은 친구들 못지않은 실력으로 알찬 수업 분위기에 일조해 온 그녀였다.

‘그런데 왜?’

눈을 감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카톡을 열었다. 그녀와 주고 받은 대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홍선생님,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점심 함께 어때요?”

“어쩌지요? 오늘은 제가 산청엘 좀 가야해서. 고마워요. 다음에 날 정해서 점심은 제가 살게요.”

“항상 바쁘시군요, 그럼 다음 기회를 잡아야겠네요.”

“아이고, 하필 오늘 그렇게 되었네요. 조만간 연락 드릴게요.”

모임이 끝난 뒤 자주 만나지 못하면서도, 가까이 사니까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은 언제나 든든하고 푸근했다. 우리는 모임에서 나이가 가장 많았고 70을 바라보는 동갑이었다. 그래서 살짝만 말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도 나도 그것이 좋았다.

‘그런데 안개 속에 있는 이 느낌은 뭐지? 인생무상이 바로 이런 건가?’

정신 차리려고 이리 저리 흘러 들어오는 생각들을 추스렸다. 이제 막 연두색으로 잎을 틔우는 이름 모를 나뭇가지를 살짝 잡고 활짝 웃는 그녀의 모습이 폰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와 단 한번 함께 걸었던 석갑산 오솔길에는 우리가 남긴 이야기들이 바람 따라 흩어졌다가 다시 모일지도 모른다. 사인(死因)이 궁금했다. 그녀와 같은 아파트에 살며 영어회화 시간에 함께 다니던 강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선생님이 웬일이래요?”

“네, 저도 먹먹합니다. 처음엔 단순 감기로 알았대요. 코로나 진단을 받고 자가격리 후 병원에 입원했는데 합병증으로..., 결국 이겨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한동안 방송에서 매일 쏟아져 나온 코로나 사망자에 그녀가 편입된 것이다.

지난 번 통화 때 담담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쉬어 있었는 데, 내가 참 무심했다.

녹음이 짙어지며, 마스크를 벗은 사람들이 이곳 저곳 경치 좋은 곳을 찾아 즐기고 있는데, 그녀는 갔다. 점심 함께 하자던 약속도 갔다. 만나서 점심을 먹고 수다를 떨며 차 한 잔 나누었으면 행복했을까. 그랬으면 우리의 짧은 인연이 더 달콤하고 쌉싸레한 여운으로 남았을까.

“우리 크루즈 여행 갈까요?‘

회화공부를 마치던 어느 날, 그녀가 말했다. 모두들 좋다고 찬성하면서도 선뜻 떠나자는 사람은 한두 명 밖에 없었다. 나이가 들수록 가족 이상으로 친구들과의 교류가 더 큰 즐거움으로 다가온다고 말하던 그녀, 그 때 좀 더 적극적이지 못했던 후회가 밀려온다.

“홍선생님은 글을 잘 써서 참 좋겠다. 부러워요.”

“무슨 말씀이세요, 가끔씩 그냥 긁적일 뿐이에요. 아무거나 쓰고 싶은 건 그냥 쓰세요. 아무렇게나 쓰세요.”

“타고난 소질이 있어야 될 것 같아요. 무엇이든 마찬가지지만.”

“윤선생님 책 읽는 것 좋아하시잖아요. 읽다 보면 내 생각을 써 보고 싶지 않으세요?”

“책 읽을 땐 행복하죠. 그런데 쓰는 건 소질이 없어요.”

스치며 지나간 단편적인 대화가 귓전을 맴돈다.

이제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졌지만, 물리적으로 만났다고 해서 만난 게 아님을 깨닫는다. 누군가 말했다. ‘진짜 만남’은 물리적인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고. 같은 공간에서 20년 일한 팀원이라도 나와 세계관이 너무 다르면 그와 나는 만난 게 아니라 20년을 같이 일했을 뿐이라고. 반대로 어느 날 누군가를 처음 만나서 차 한 잔 했는데 그 시간이 너무 좋았다면, 그 사람과는 만난 것이라고.

그녀와 나눈 소소한 대화와 눈빛, 표정, 몸짓, 언뜻 언뜻 비치던 속마음, 나는 지금 그녀를 그리워 하고 있다.

“오늘 점심은 내가 살 게요.”

회원들 앞에서 따뜻한 우정을 보여주던 그녀의 마음이 나를 북삼아 때린다. 그녀는 늘 내게 다가왔고 손을 내밀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다음만 기약했던 나를 그녀는 서운해 했을까?

그녀와 나는 어떤 인연일까? 법정 스님 말씀이 떠오른다.

‘진정한 인연과 스쳐가는 인연은 구분해서 맺어야 한다. 진정한 인연이라면 최선을 다 해서 좋은 인연을 맺도록 노력하고, 스쳐가는 인연이라면 무심코 지나쳐 버려야 한다.’

너무나 짧았다. 칠십 줄에 들어 선 동갑내기 그녀와 나는 이제 영영 헤어지게 됐다. 노후에 좋은 벗 만나는 건 큰 행운이다. 그녀와의 이별로 인해 나는 부칠 수 없는 쓸쓸한 편지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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