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숙과 도가니탕

by roun

정은은 시누이 여진과 함께 시댁에 가기 위해 보름치 짐을 꾸렸다.

'이번에도 가면 최소 보름이야'

남편 성호와 함께 있는 시간보다 시댁에서 머무는 날이 훨씬 많았다.

불편함이 몸에 배어, 이제는 불편함이 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언제나 그렇듯, 시어머니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딸 여진의 짐만 받아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정은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 뒤를 터덜터덜 따라 걸어 들어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워낙 딸이 귀한 집안이라 정은의 딸 예빈만큼은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랑을 듬뿍 받았다.

정은은 시어머니 다그침에 식사 준비를 서둘렀다.

귀한 사위님이 오신다니, 굶겨서 보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장인, 장모에게 살갑게 구는 사위도 아니건만 사위는 백년손님이라고 어렵기만 한 모양인지 사위만 오면 자동으로 굽신 굽신이다.

딸 여진은 자신의 남편을 어려워하는 부모님을 당연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시부모 위에 시누이 여진이 있었다.


정은이 둘째 아이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정은의 몸조리를 도와줄 사람도 없었고 산후조리원에 들어갈 형편은 더더욱 안되었다.


"내가 몸조리해 줄게. 우리 집에 와 있어라."


이 순간에는 시어머니 눈에 정은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손수 몸조리를 자처했다.

정은은 감사한 마음이 들었지만 만류했다.

시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을 받아먹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자 불편함이 온몸으로 밀려왔다.

하지만 정은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정은은 둘째 아이를 출산하고 바로 시댁으로 들어갔다.

시누이 여진도 와 있었다.

시어머니가 미역국을 끓이려고 준비하자 여진이 말했다.


"엄마! 미역국 끓이지 말고 도가니탕 끓여. 나 도가니탕 먹고 싶어!"


시어머니가 멈칫하더니 정은에게 물었다.


"너, 도가니탕 먹을 줄 아니?"


정은은 물컹한 식감 때문에 도가니탕을 못 먹는다고 솔직하게 말했지만 딸 여진이 먹고 싶다고 말한 이상, 이번에도 정은의 선택권은 없었다.


"도가니탕을 왜 못 먹어. 도가니탕 끓여 줄게. 먹어봐~"


딸 여진이 먹고 싶어 끓이는 걸, 며느리 정은에게 '끓여 줄게'라고 말하는 시어머니가 정은은 얄밉게 느껴졌다.


정은은 팔자에 산후조리가 없는 모양인지, 첫 아이를 출산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퇴원하고 하루 만에 몸조리를 그만뒀다.

둘째 아이와 함께 방에 누워 있으면 주방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들려왔다.

보이지 않지만 정은은 알 수 있었다.

시어머니 혼자 집안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져서 가만히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마음이 불편했던 정은은 방문을 열고 나가 보았다.


"어머님, 제가 도와드릴까요?"


마침 빨래를 개키고 있던 시어머니는 빨랫더미를 정은 앞으로 밀어 놓으며 말했다.


"그래. 와서 이것 좀 개켜라."


빨래를 개키는 것을 시작으로 자연스럽게 집안일이 정은의 몫으로 떨어졌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려고 주방으로 들어가는 정은을 말리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정은이 설거지를 하는 사이, 아기가 울기 시작했다.

아기에게 가보려고 정은이 서둘러 고무장갑을 벗으려 하자, 시어머니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애는 내가 볼 테니, 너는 하던 거 마저 해라."


정은은 고무장갑을 다시 끼고, 묵묵히 그릇을 닦았다.


다음 날 아침, 정은은 몸조리를 그만두고 아기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몸조리를 벌써 그만두게? 너 그러다 몸 다 상한다."


시어머니는 화들짝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정은은 기가 막혔다.

시어머니가 차려준 밥상 딱 한 번 받고, 두 번 받으면 체할 것 같아 자리 털고 일어나 집안일 다했는데.. 집안일하는 정은을 보고도 말리는 사람 하나 없더니 몸조리 그만한다고 놀라며 되묻는 건 말이야 똥이야.

마음 같아서는 '제가 언제 산후조리를 하기는 했나요?'라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정은은 그 말을 마음 깊은 곳에 꾹 눌러 넣었다.


출산을 두 달 앞두고 여진은 감기에 걸려 고생 중이었다.

시어머니는 임신 중이라 약을 먹지 못하는 딸을 위해 정성껏 배숙을 끓였다.

정은과 여진이 곤히 잠들어 있는 방에 시어머니는 발소리에 깰까 살금살금 까치발로 들어왔다.

밥 할 때는 여진 몰래 정은만 깨워 불러내더니, 배숙은 딸만 조용히 깨워 먹인다.

정은은 인기척에 잠에서 깨어 그 모습을 보았지만 못 본 척 슬쩍 몸을 돌려 누웠다.

뜨거운 배숙을 숟가락으로 떠서 후후 불어 딸 입에 넣어 주는 시어머니 모습을 보자 정은은 첫 아이 출산 후, 들통 한가득 미역국을 끓여 놓고 아침저녁으로 오가며 자신을 챙기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라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런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자취를 감춰버렸다는 사실이 새삼 믿기지 않았다.

미운 엄마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미치도록 사무치고 그립기만 한 엄마였다.


"엄마..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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