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이 집 며느리, 안 할겁니다!

by roun

정은과 성호의 성실함과 노력으로 식당은 점점 자리를 잡아갔다.

단골들도 많아지고 시그니처 메뉴도 생겼다.

쉬는 날도 없이 일만 해서 오히려 손님들이 쉬어 가며 하라고 말할 정도였다.

명절 연휴에는 평균 매출의 세 배가 뛸 정도로 바빠서 정은은 밤새 재료 준비로 잠도 못 자고 출근할 때가 많았다.

추석이 열흘 정도 남았을 무렵, 정은은 시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네, 어머님~"


"곧 있으면 추석인데 어떻게 할래?"


"네.. 일이 좀 많긴 한데, 최대한 서둘러서 해놓고 들어 갈게요.."


정은은 내심 다른 말을 기대했다.

일 많으니 천천히 와도 된다는, 그 한마디를.. 하지만 그런 말이 나올 리 없다는 걸 정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추석은 아직 열흘이나 남아 있었지만, 시어머니의 관심은 며느리의 고단함이 아니라 명절의 준비 여부에 있었다. 그 사실이 정은의 마음을 씁쓸하게 했다.


연휴가 시작되자 정은은 완전히 녹초가 됐다.

남편 성호가 나서서 이번만큼은 자신이 시댁에 가지 않도록 막아주길 바랐지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은은 며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멍한 상태였고 잠깐 눈 붙이고 일어나 시댁으로 출발할까 했지만 늦게 도착해서 눈치 보는 게 더 싫었다.

정은은 절로 나오는 한숨을 삼키며 시댁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소파에 걸터앉아 있는 시누이 여진이 눈에 들어왔다.

정은은 인사만 건네고 곧장 주방으로 들어갔다.

싱크대엔 아침 식사를 마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설거지를 하는 사이, 거실에서 여진의 목소리가 흘러왔다.


"표정 왜 저래?"


물소리에 묻혀 정은은 자신을 향한 말인지 알지 못했다.


"아니, 표정이 왜 저러냐고."


정은은 잠시 멈칫했지만 모른 척, 다시 설거지를 했다.


"아, 진짜! 표정이 왜 저러냐니까!!!!!"


정은은 그제야 자신을 두고 하는 말임을 깨달았다.

정은은 끼고 있던 고무장갑을 벗어 설거지통에 던지고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여진을 향해 소리쳤다.


"야!!!!! 내가 네 오빠랑 사니까 이 집 며느리고 네 올케인거지! 네 오빠랑 이혼하면 남 아니야? 나 네 오빠랑 안 살 거니까 앞으로 나한테 함부로 하지 마!"


정은은 큰소리쳤지만 목소리는 사시나무 떨 듯, 떨리고 있었다.

그동안 삼켜온 울분을 모두 쏟아내고 정은은 집 밖을 나섰다.

평소엔 늘 형수 편을 들던 시동생도, 막상 일이 터지자 정은을 나무랐다.

정은은 성호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성호는 잠시 침묵하다가 한마디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할 수 없지 뭐.."


정은은 성호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정은은 조금 전의 상황을 돌아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피로감에 지쳐 있던 상태는 맞지만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던 건, 시누이 여진을 보고 나서였다.

원래는 시누이 여진도 자신의 시댁에 가서 음식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시부모님이 해외여행을 가며 뜻하지 않은 휴가를 받은 것이다. 자신만이 누릴 수 있는 이 황금 같은 여유를 올케 정은에게 자랑하고 싶어 안달 난 것처럼 보였다.

정은은 언제부턴가 시댁에 갈 때면 아예 일하기 편한 옷을 입고 갔다. 옷을 갈아입는 시간도 아까울 만큼 시댁으로 들어선 정은에겐 늘 일거리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오늘도 날이 날인만큼 정은을 기다리고 있는 건, 어수선한 주방이었다.

정은이 생각해도 시누이 여진이 친정에 놀러 오는 것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주방에 일거리들을 가득 쌓아 두고 시시덕거리며 앉아 정은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 정도 나이를 먹고 생각이 있다면 맛살이라도 한 봉지 까놓고 자신을 기다려도 기다렸어야지, 정은은 시누이 여진의 태도가 아쉬웠다. 그런데 거기다 대고 올케 정은의 표정을 나무라고 있으니, 정은은 할 수 있다면 뺨이라도 한 대 올려붙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족이라면 표정이 어두운 정은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너도 나도 걱정을 해줬어야 맞는 일이지, 표정 관리 못한다고 타박할 일인가..

정은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잘라내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갈지, 시댁으로 갈지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할 도리는 하자’는 생각에 다시 시댁으로 향했다.

문 앞에서 요동치는 심장을 가다듬고, 최대한 괜찮은 척을 했다.

소란을 피워 죄송하다고 말했지만 집안엔 서늘한 공기만이 감돌았다.

불편함도 자신의 몫이라 여기며 정은은 묵묵히 음식을 준비했다.


추석 당일 아침, 차례를 마치고 정은은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전날의 일을 성호에게 조심스레 다시 꺼냈지만 성호는 남의 일처럼 무심했다.

일주일 후, 성호는 정은에게 말했다.


"집에서 전화 왔어. 직접 와서 무릎 꿇고 사과하래."


그때는 이혼을 결심하고 싶을 만큼 분노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다른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화보다도 어른들 앞에서 버릇없이 행동했다는 자책이 더 크게 남았다.

다음 날, 정은은 성호와 함께 아침 일찍 시댁으로 갔다.


"어머님, 저 왔어요.."


시어머니는 정은과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TV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은은 시아버지가 계신 방으로 향했다.


"아버님, 저 왔어요.."


정은은 자신의 뒤로 성호도 당연히 따라 들어올 거라 생각했지만 성호는 정은만 방으로 들여보내고는 자신의 어머니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아버지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려 애쓰며 말했다.


"여진이 시부모님이 해외여행 가셔서 친정에 놀러 온 게 잘못이냐?"


"여진이한테도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사과해라. 그러면 용서하마."


정은이 대역죄인처럼 혼이 나는 동안, 거실에서는 시어머니와 성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이 정은의 가슴을 찔렀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자신이, 그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웃고 있는 성호가 너무도 선명하게 대비됐다.

식당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정은은 창밖만 바라봤다.

정은은 자신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줄 줄 알았던 남편이, 자신을 절대 지켜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심을 굳힌 정은은 자신의 입술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내가 언젠가는 너랑 반드시 이혼하고 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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