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의 엄마, 미순의 이야기

by roun

정은은 자신의 결혼 생활이 친정 부모님의 결혼 생활과 많이 닮아있는 것 같았다.

남편 성호는 정은의 울타리가 되어 주지 않았고 늘 시댁이라는 전쟁터에 혼자 보냈으며 아내의 고통과 상처를 외면했다. 그 모습이 정은의 친정 아빠와 많이 닮아 있어서 정은은 '딸은 엄마 팔자 닮는다더니, 자신이 엄마의 수순을 그대로 밟아가고 있다'라고 생각했다.

시댁에 다녀오는 날이면 친정 엄마의 마음이 '이랬겠구나' 절절하게 느껴져 가슴이 저렸다.


정은의 엄마 미순은 오 남매 중, 막내로 어린 나이에 심장병으로 엄마를 떠나보냈다.

미순의 아빠는 키도 크고 인물이 좋아서 총각이면 중매를 서도 몇 번을 섰을 거라며 동네 어르신들이 입모아 말했지만 외모만 훤칠하지, 술 좋아하는 만년 백수의 무능력한 아버지였다.

일도 안 하고 늘 술에 거하게 취한 모습으로 집에 들어오는 남편 대신, 미순의 엄마는 자식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몸보다 큰 보따리를 이고 지고 장사를 다녔다.

길을 걷다 숨이 차면 허리춤에서 보자기를 꺼내 땅에 펼치고 그 위에 누워 조금 쉬었다가 괜찮아지면 다시 길을 나섰다.

미순의 엄마가 수술비로 모아놓은 쌈짓돈을 큰오빠 수철이 훔쳐서 여자친구와 야반도주하는 바람에 엄마가 수술도 받지 못하고 앓다가 죽었다며 미순은 큰오빠 수철을 미워했다.


미순이 엄마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순의 아빠는 미순을 춘천에 살고 있는 배다른 맏언니 성자에게로 보내 버렸다. 성자는 아빠가 재혼해서 낳은 미순을 예뻐할 리 없었다. 밥을 주지 않아 미순은 늘 배고파했고 동네에 피부병이 돌아 미순의 온몸에 피딱지가 앉고 고름 투성이가 되었을 때에도 성자는 옮을까 봐 어린 미순을 창고에 가두었다. 미순의 바로 위, 오빠 정철은 동생이 보고 싶어 성자의 집을 찾았다가 금방이라도 죽게 생긴 미순의 모습을 보고 그 길로 미순을 둘러업고 그 먼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미순이 다시 돌아온 집에는 새어머니가 있었다. 자식이 없었던 새어머니는 평소엔 미순을 예뻐라 했지만 술만 마시면 폭군이 되어 미순의 머리를 벽에 들이박고 사정없이 때렸다. 한 겨울, 꽁꽁 언 개울물을 깨서 빨래를 하고 얼어붙은 손을 후후 불며 집으로 돌아오면 문밖으로 주전자 하나가 던져졌다.


"가서 술 한 주전자 받아와라!"


미순의 언니와 오빠들은 돈을 벌어 미순을 데리러 오겠다며 진작 집을 떠난 지 오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미순을 데리러 오는 이는 없었다.


미순은 집을 나와 공장에 취직했다. 마땅히 지낼 곳이 없는 미순에게 공장은 돈도 벌 수 있고 거처도 해결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외상값 드리려고 왔어요. 얼마 드리면 되죠?"


미순이 근무하는 공장에는 작은 점방이 있는데 공장 직원들은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갈 수 있었다.

미순은 월급날이면 외상값을 갚으러 점방으로 달려갔다.


"미순아, 네 외상값 하나도 없어~"


점방 할머니 말에 미순은 어리둥절했다.


"할머니, 저 외상 값있어요. 다시 한번 잘 찾아보세요."


미순은 다시 한번, 확인해 보라며 외상장부를 할머니 앞으로 밀어 놓았다.


"어떤 청년이 미순이 네 외상값, 전부 갚아주고 갔다!"


할머니 말에 놀란 미순은 그 청년이 누군지 궁금했다.


"할머니, 그 사람이 누구예요?"


미순의 질문에 할머니는 미순의 두 손을 모아 잡으며 말했다.


"미순아, 너 여기서 고생하지 말고 이참에 시집이나 가거라. 네 공장 기사 중에 정근이라는 청년 있지? 그 청년처럼 성실한 사람을 내가 본 적이 없다. 사람은 그저 성실한 게 최고다!"


평소에 미순은 관심도 없던 정근이었지만 점방 할머니 말에 미순은 생각해 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점방을 나왔다.


정근이 미순의 점방 외상값을 갚아줬단 소문이 돌면서 미순은 떠밀리듯, 정근과 선을 보게 되었다.

약속 시간에 맞춰 나갔지만 미순은 외상값을 갚아줬다는 이유로 관심도 없는 남자를 만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골목 어귀에 서서 만나기로 한 다방 출입구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걸어오던 정근의 모습을 보고 미순은 뒤돌아 곧장 공장 기숙사를 향해 뛰었다.


"야! 너는 그냥 돌아오면 어떻게 해!"


정근을 만나지 않고 돌아온 미순을 보고 동료들이 한 마디씩 했다.


"나 그 기사 아저씨 못 만나겠어. 2대 8 가르마에 무스를 얼마나 바른 건지 머리는 반짝반짝하고.. 아흐"


미순은 고개를 저으며 잠옷으로 갈아입고 꽁꽁 언 몸을 녹이기 위해 냉큼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오랫동안 미순을 몰래 지켜보고 좋아했던 정근은 용기 내어 미순을 찾아왔다. 잠깐이면 된다는 말에 미순은 입고 있던 잠옷 위에 도톰한 카디건 하나만 걸치고 나갔다. 잠시 얘기만 나누고 기숙사로 돌아올 줄 알았던 미순은 그 길로 정근의 손에 이끌려 정근의 어머니 집으로 갔다.

미순은 두렵고 무서웠지만 정근은 막무가내였다.

미순이 자신을 만나주지 않을까 봐 미순을 다짜고짜 자신의 어머니에게 인사시키고 결혼을 하겠다며 선언해 버린 것이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순은 공장을 그만두고 정근의 큰누나네, 방 하나를 빌려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방은 두 사람이 겨우 몸을 뉘일 수 있을 만큼 작아서 작은 서랍장 하나도 놓을 자리가 없었다.

정근이 큰누나 집에 얹혀 신혼살림을 시작해야 했던 이유는 누나가 친정에서 가지고 있던 집과 논을 죄다 팔아 시작한 사업이 쫄딱 망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정근의 매형은 돈을 벌어오겠다며 외국으로 가버렸고 누나는 춤바람이 나서 밤낮으로 춤만 추러 다녔다.

어린 조카들은 외숙모인 미순이 깨끗하고 씻기고 입히며 알뜰살뜰 챙겼다.


일찍 엄마를 여의고 늘 엄마 소리가 고팠던 미순은 정근의 어머니에게 엄마라고 불렀다가 된통 혼이 났다.


"내가 왜 네 엄마냐?"


미순은 불쾌해하는 시어머니에게 다시는 그렇게 부르지 않겠다며 죄송하다고 말했지만 시어머니는 아들 정근을 불러 단속을 시켰다.


"네 마누라한테 그놈에 엄마 소리 좀 하지 말라고 해라! 걔한테 엄마 소리 들을 때마다 아주 소름 끼쳐 죽겠어!"


그 말을 들은 정근은 미순에게 '엄마가 듣기 싫다는데 왜 자꾸 엄마라고 불러 사람 불편하게 하냐며' 화를 냈다.


정근과 미순이 잠자리에 들려고 자리를 펴고 누우면 시어머니는 꼭 두 사람 사이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정근의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 병으로 남편을 잃고 다섯 남매를 혼자 힘으로 키워낸 억척스러운 사람이었다. 어머니에게 장남 정근은 귀한 아들이자, 남편이었다.


정근 밑으로 두 아들을 다 결혼을 시키고 며느리를 둘이나 더 보았어도 정근의 어머니는 유독 미순에게만 차가웠다.

미순은 그게 다 친정 부모님이 계시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늘 미순의 친정 식구들을 표현할 땐, '거지 떼들'이라고 했다. 반면 미순 아랫동서인 두 며느리는 집안도 번듯하고 배울 만큼 배웠으며 자기 할 말은 똑 부러지게 했다. 시어머니는 그런 며느리들 앞에서는 한없이 친절했고 상냥했다.

식구들이 모두 미순을 막 대하자 동서들도 미순을 깔보았다.


명절 음식도 제사 음식도 모두 큰며느리인 미순 혼자서만 했다. 작은 며느리들에게 전화가 오면 시어머니는 다해서 할 거 없으니 천천히 오라고 했다. 미순이 음식 준비를 해놓으면 동서들은 느지막이 와서 전이 담긴 채반 위에 돈 봉투 하나를 휙 던지고는 시어머니에게 달려가 갖은 아양을 떨었다.

미순은 돈 봉투를 한쪽으로 쓱 밀어놓고 홀로 음식을 마저 해나갔다.


시어머니는 미순이 친정에 다녀오는 날이면 친정 식구들에게 몰래 뭘 퍼다 주었는지 추궁하고 정말 뭐라도 챙겨 다 준 걸 들키면 아들 정근에게 쪼르르 달려가 일러 주었다. 어머니 말을 들은 정근은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미순을 때렸다. 정근의 발길질에 도망치다 코너에 몰린 미순을 보고 시어머니는 한 마디 했다.


"맞아야 정신 차린다. 더 때려라!"


미순은 목도 가누지 못하는 아기 정민을 등에 업혀 포대기를 두르고 정은을 챙겨 집에서 도망쳤다. 갈 곳 없던 미순은 항상 언니 정순의 집에 숨었고 미순을 찾아온 정근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몇 번을 도망쳤지만 항상 잡혀 오다 보니 어느 순간, 미순은 포기하고 그냥 살기로 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다짐한 것이 하나! 있었다.


"정은이 고등학교 졸업만 하면 이혼할 거야! 꼭!"


정은이 고등학교 졸업까지 아직 한참 남았지만 미순은 그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결국 일을 벌였다.

일을 시작한 미순이 손님으로 알게 된 남자와 야반도주를 한 것이다.

집은 발칵 뒤집혔고 정근의 일상은 무너졌다.

마시지도 못하는 독한 술을 들이부었고 취해서 잠들면서도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흐르고 미순이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미순은 정은, 정민과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들만 보아도 아이들이 눈에 밟혀 견딜 수 없다고 했다.

잘못했으니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정근에게 싹싹 빌었다.


정근은 아이들을 생각해 미순을 용서하는 듯했지만 아내가 외도했다는 사실을 떨쳐버리기란 쉽지 않았다.

아이들이 잠든 밤이면 매일 미순을 괴롭혔다.


그런 정근에게 미순은 소리치며 말했다.


"제발 그만해.. 그러게 나 좀 예쁘다, 잘한다 해주지.. 나 좀 불쌍하게 생각해서 품어주고 위해주지.. 당신 싫다는 나를 억지로 데려다 결혼해 놓고 그동안 나한테 어떻게 했어! 당신, 어머님, 누나들, 동생들, 심지어 동서들까지 나 대놓고 무시하고 그것도 모자라 내 친정식구들까지 거지 떼들이라며 사람 취급도 안 했어! 당신들 마음에 안 들면 허구한 날 소리치고 때리고 욕하고! 근데 그 사람은 아니더라, 안 그러더라. 살면서 처음으로 생각했어. 아, 세상에는 나를 이렇게 귀하게 여겨주는 사람도 있구나.. 그래서 그렇게 귀하게 여겨주는 사람하고 한 번 살아보고 싶어서 도망갔어. 왜!"


미순의 울부짖음에 정근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음 날, 미순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정은을 불러다 놓고 말했다.


"정은아, 엄마 친구들하고 여행 다녀올게.. 정민이 잘 챙겨주고 있어.."


정은은 엄마가 여행을 핑계로 다시 우리 곁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은은 엄마 제발 우리 버리고 가지 말라고 떼라도 써서 엄마를 붙잡고 싶었지만 넋이 나간 엄마의 얼굴을 보니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정은은 엄마의 품을 파고들며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말했다.


"엄마, 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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