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고 처음 맞이하는 추석 명절.
지방 근무 중인 남편과 주말 부부로 지내던 정은은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첫날, 시댁으로 향할 준비에 분주했다.
정은이 만삭의 몸으로 남편도 없이 혼자 시댁에 가야 한다는 사실에 정은의 엄마는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혹여나 딸 정은이 시댁에 밉보이지는 않을까..
정은의 엄마는 밤새 정성껏 만든 음식을 차에 가득 싣고, 정은과 함께 길을 나섰다.
"홀몸도 아니고, 그 멀리를 혼자 어떻게 가려고 그래!"
목소리에 잔뜩 날이 선 정은의 엄마가 정은에게 다그치듯 말했다.
시댁으로 가는 교통편은 버스뿐인데 한 번에 가는 노선이 없어 여러 정류장을 경유해야 했고 마지막 정류장에 내려서도 30분은 족히 걸어 들어가야 했다.
그 멀고 불편한 길을 만삭의 딸이 짐까지 들고 혼자 간다고 생각하니 정은의 엄마는 속에서 천불이 나는 거다.
며느리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돈에 대한 서운함보다 싹부터 남의 편 같은, 내 딸의 남편인 사위 놈이 곱게 보일리 없었다.
"네가 처음 성호 데리고 집에 왔을 때부터 나는 마음에 안 들었어."
"키는 작고 남자가 다리는 또 왜 그렇게 가늘어? 듬직한 맛이 하나도 없어!"
"마음에 안 드니까 먹는 것도 꼴 보기 싫더라."
"내 딸은 꼭 막내며느리 자리로 시집가서 시부모님 귀여움 듬뿍 받으며 살길 원했는데 결국은 너도 맏며느리야!"
정은의 엄마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사위가 마음에 안 들어 죽겠어'가 아니라 '맏며느리가 뭔지도 모르고 맏며느리 자리를 차고 들어가. 이 답답아!'라는 걸, 정은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은은 엄마의 한탄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엄마 두고 봐봐. 나는 엄마 보란 듯이 내 가정 잘 지키고 잘 살 거야. 그리고 인정받고 사랑받는 며느리가 될 거야!'라고 보이지 않는 가시 돋친 말로 엄마 속을 더 깊이 할퀴고 있었다.
"어머님, 저 왔어요."
"사돈, 명절이라 음식을 좀 해 왔어요. 넉넉하게 했으니 친척분들 오시면 함께 드세요."
짧은 인사를 나눈 뒤, 정은의 엄마는 황급히 몸을 돌려 나갔다.
막상 그런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정은은 속상함이 밀려왔다.
'딸 가진 죄인'의 모습이 지금 우리 엄마 같겠구나, 너무 알 것 같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정은에게는 숨 돌릴 틈조차 없는 명절이 이어졌다.
추석 전날,
아침 식사를 하고 설거지를 막 끝낸 정은이 젖은 손을 닦아내던 참이었다.
그때 방에서 시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랑 과일 좀 깎아와라'
부랴부랴 다과상을 준비해서 안방에 가져다 드리고 나니 정은의 앞으로 전 부칠 재료들이 쏟아졌다.
창이 커서 환기가 가장 잘 될 것 같은 방에 신문지를 넓게 펴고 그 위에 전기 그릴 팬 두 개를 나란히 올려놓았다.
재료의 양을 보니 정은은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것 같았다.
팔을 걷어붙이고 자세를 바로 잡은 정은은 홀로 전을 부치기 시작했다.
시아버지는 5형제 중, 맏이로 큰집인 정은의 시댁에 올 친척은 네 집이었다.
서로 연락해서 비슷한 시간대에 도착하면 좋으련만, 제각각 다른 시간에 도착했다.
"어~ 둘째야. 몇 시쯤 도착할 예정이냐?"
"어~ 셋째야. 너는 몇 시쯤 도착할 예정이냐?"
"어~ 넷째야. 출발은 했냐? 밥 안 먹었지? 밥은 집에 와서 먹어라~"
"어~ 막내야. 도착하기 10분 전에 전화해라. 와서 바로 밥 먹을 수 있게 준비해 놓을게."
시아버지의 전화벨이 울리면 곧 친척 중 한 집이 도착한다는 소리이므로 정은은 전을 부치다 말고 주방으로 나가 쌀을 씻어 밥을 안쳤다.
시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찌개를 끓이고 고기도 볶았다.
접시에 정갈하게 담은 반찬들과 함께 정은은 전을 부치는 방과 주방을 오가며 상을 네 번이나 차려냈다.
중간중간 시아버지 요청에 술상과 다과상까지 준비하려니 정은은 정신도 없고 몸도 너무 고단했다.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끝도 없던 일이 겨우 마무리되었다.
뒷정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정은의 발끝 쪽으로 고추 한 박스가 쓱 밀려왔다.
"음식 한 김에 동그랑땡 속 넣고 고추 튀김도 좀 하게 고추 좀 씻어 놔라."
"네.. 어머님.."
정은은 싱크대 앞에 서서, 불뚝 솟은 배가 다 젖도록 고추를 씻었다.
그때 시어머니와 시작은 어머니들의 대화가 정은의 귀에 들려왔다.
"어머! 형님! 방금 구운 빵이어서 그런지 따뜻하니 너무 맛있네요~"
"동서, 맛있지? 글쎄 우리 여진이가 엄마 빵 좋아한다고 빵 만드는 기계를 다 사서 보내더라니까~"
정은이 살짝 뒤돌아 보니 시어머니와 시작은 어머니들은 상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앉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빵조각을 후후 불어가며 드시고 계셨다.
"며느리! 고추 꼭지를 다 따버리면 어떻게 해. 고추 튀김 한 번도 안 먹어봤어?"
넷째 작은 어머니는 정은에게 쏘아붙이 듯이 얘기했다.
정은은 민망하고 당황해서 고추 튀김에 원래 꼭지가 붙어 있었는지, 떼어져 있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민망함이, 서러움이, 온몸을 타고 올라왔다.
"꼭지는 못 먹으니까 당연히 떼어야 하는 건 줄 알았어요. 죄송해요.."
시댁에 도착한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일이 한꺼번에 되감기듯 떠오르며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정은은 얼른 얼굴을 돌려 감추고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갔다.
방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가만히 눈을 감으니 친정 엄마 얼굴이 스쳤다.
"엄마, 너무 보고 싶어.."
추석 당일 아침.
차례를 지내고 뒷정리가 마무리될 즈음, 정은의 배가 갑자기 단단하게 뭉쳐오기 시작했다.
정은은 그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통증이라 무서움에 배를 움켜 잡고 주저앉았다.
"정은아, 왜 그러니?"
정은의 모습을 보고 놀란 시어머니가 정은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모르겠어요..... 갑자기 배가 아파요....."
주방을 지나던 시아버지는 걸음을 멈추고 멀뚱히 서서, 바닥에 주저앉은 정은을 내려다보았다.
"너 왜 그러냐?"
"아니 얘가 글쎄 배가 아프다고 하네요."
시어머니의 말에 시아버지는 목소리를 낮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죽을 정도로 아픈 거 아니면 친척들도 있는데 티 내지 마라!"
그 말에 정은은 배를 움켜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풀고, 숨을 고르며 싱크대에 기대어 설거지를 이어갔다.
모든 정리가 끝나고 한숨 돌릴 무렵, 남편 성호가 도착했다.
"엄마, 나 왔어~"
정은은 남편의 목소리를 들으니 천군마마를 얻은 것처럼 든든했다.
오랜만에 본가에 온 성호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남편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은은 힘이 났다.
"형님, 며느리 친정에 보내야 하지 않아요?"
고추 꼭지를 다 따버렸다며 면박을 주던 넷째 작은 어머니가 정은이 기다리던 말을 대신해주었다.
"응. 조금 있다가 가라고 해야지~"
"형님, 며느리 친정에서 음식을 많이 해서 보내셨는데 며느리 갈 때 뭐라도 챙겨서 보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젯밤 얄미워 죽겠던 넷째 작은 어머니가 맞나? 새삼 다르게 보였다.
생각도 안 하고 있다가 동서의 말을 들은 시어머니는, 순간 '아차' 싶었는지 시아버지에게 다가가 말했다.
"며느리 친정 갈 때, 뭐라도 사서 들려 보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자 시아버지는 발끈하며 목소리를 높혔다.
"성호가 지 처갓집에 가는데 지가 알아서 사가야지. 내가 왜?"
시아버지에 이야기해 봐야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시어머니는 안방 장롱 앞에 의자를 두고 올라섰다.
장롱 위에서 꺼낸 것은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을만 먼지가 두툼하게 쌓인 양주 상자였다.
시어머니는 뽀얗게 쌓인 먼지를 욕실 앞에 놓인 발걸레로 슥슥 닦아 '가져 가라'며 현관에 내려 놓았다.
다 닦아내지 못해 군데군데 먼지가 남은 양주 상자를 정은은 잠시 내려다보았다.
묵은 기운처럼 눌어붙은 그 먼지가, 명절 내내 자신 겪은 서러움과 꼭 닮아 있었다.
그 양주 상자를 들고 친정에 가는 모습을 상상하니, 발끝부터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정은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 뒤, 남편 성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 집에 가서 쉬고 싶어..”
그 한마디로 토해내고 싶은 울분과 복잡한 감정들을 정은은 꾸역꾸역 삼켜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