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과 성호의 신혼 생활은 너무나도 초라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족들에게서 벗어나 도망치듯 결혼을 서둘렀던 후배 경미의 신혼이 문득 떠올랐다.
경미의 남편은 연로하신 할머니를 모시며 월급을 받아 근근이 살아가던 남자였다.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단칸방에서 경미는 신혼살림을 꾸렸다.
형편이 녹록지 않았던 경미는 집 근처 재래시장 안에 있는 천냥마트에 들러 천원짜리 가격표가 붙은 컵과 그릇을 두 개씩 골라 바구니에 담았다.
그 모습을 본 정은은 속으로 다짐했다.
"나는 절대 경미처럼 신혼을 시작하지 않을 거야!"
어른들 말씀이 사람은 자고로 입찬소리하는 게 아니라 하더니, 정은은 그때의 경미와 무척 많이 닮아 있었다.
파스텔톤의 아기자기한 그릇들을 뒤로하고 3천 원짜리 누런 양은 냄비 하나 들고 나오는 자신의 모습이 정은은 한없이 차량 맞게 느껴졌다.
대학 졸업하면 직장 생활하며 착실히 돈 모아 장가갈 줄 알았던 장남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하겠다며 여자를 데리고 왔으니 부모 입장에선 기가 찰 노릇이다.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막상 며느리 될 아이를 보고 나니 생각보다 싹싹하다 싶어 성호의 부모는 결혼을 허락했다.
신혼집은 성호의 부모님이 마련해 주기로 했기에 성호는 부모님 부름에 본가를 찾았다.
"오빠 집에 갈 때, 나도 같이 가!"
성호의 여동생 여진이었다.
직장 생활로 평소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해 오빠가 가는 길에 겸사겸사 함께 길을 나선 것이라 정은은 생각했다.
본가에 다녀온 성호가 정은에게 얘기했다.
"아버지가 원래는 3천만 원을 해주려고 하셨는데 여진이가 지금 사는 원룸 계약이 곧 만기라 이참에 오피스텔로 옮기고 싶다고 하네. 근데 보증금이 부족해서 1천만 원은 여진이 주기로 하고 우리는 2천만 원으로 집을 알아봐야 할 것 같아."
정은은 2천만 원으로 신혼집을 어떻게 구해야 하나 막막했지만 돈 한 푼 없이 결혼부터 하겠다는 철없는 우리가 문제지, 성호의 부모님과 예비 시누이를 탓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2천만 원으로 신혼집은 구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월세집을 알아보았지만 부동산에서는 매물이 없다며 주택 일부를 개조하여 원룸처럼 꾸며 놓은 조립식 창고와 상가 건물 옥탑만을 소개했다.
결국 정은과 성호는 본 것 중, 그나마 제일 낫다고 생각한 상가 건물 옥탑을 계약했다.
신혼집의 큰 살림들은 대부분 정은의 엄마가 채워 주었다.
딸의 집을 찾을 때마다, 정은의 엄마는 먹을거리부터 자잘한 살림살이까지 양손 가득 챙겨 왔다.
엄마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정은의 신혼집은 점점 살림집다운 모습을 갖춰 갔다.
결혼식 날짜가 정해지고 상견례 일정을 조율하는 중에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아빠도 없는데 엄마들끼리 만나 이야기하면 되지. 나도 가야 되냐?"
성호 아버지는 상견례에 나가고 싶지 않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사실 정은의 부모님은 정은이 중학교 입학을 하던 해에 이혼을 하고 각자 재혼을 해서 살고 있었다.
아빠와 함께 살던 정은은 늘 엄마를 그리워했다.
그리움은 날이 갈수록 커졌고 결국 정은은 엄마를 찾아 집을 떠났다.
"키워준 공을 모른다"며 화가 난, 정은의 아빠는 딸에게 절연을 선언했고 정은은 아빠를 만나지 못했다.
성호 아버지는 정은의 복잡한 가정사를 알고 나니 탐탁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들끼리 만나 결혼식에 관련하여 의논을 나누고 상견례를 마쳤다.
예단이고 예물이고 서로 주지도 받지도 말자고 협의하였지만 정은의 엄마는 정은이 결혼 생활하는 내내, "시집올 때, 뭐 해왔니?" 소리를 들을까 봐 정은의 시부모, 시누이, 친척들 침구를 준비해서 보냈다.
어느 날, 정은은 성호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아버님, 안녕하세요~"
"너 시간 되면 집에 한번 들르거라."
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정은은 자신이 잘못한 말이나 행동이 있었는지 곱씹어 보았다. 그리고 정은은 잔뜩 긴장한 상태로 성호의 본가를 찾았다.
"어머님, 아버님, 저 왔어요~"
"왔냐? 집에 들어올 필요 없으니 엄마 따라 시내에 다녀와라."
성호 아버지 말씀에 정은은 당황했지만 성호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성호 어머니와 길을 나섰다.
성호 어머니는 정은을 데리고 시내 금은방으로 들어갔다.
"정은아,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봐. 아버님이 너 뭐 하나 사주란다."
정은은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라 너무 놀라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고르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구르며 금은방 안에 있지도 바깥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정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오늘 중으로 해결이 안 나겠다 싶었는지 성호 어머니는 알이 제법 굵은 반지와 목걸이를 고르고 계산을 마쳤다.
정은은 얼떨떨해하며 이번에는 '어머님, 감사합니다.'는 말만 반복했다.
정은은 성호 아버지께도 감사 인사를 드렸다.
"아버님, 선물 감사합니다. 저 정말 생각지도 못했는데.. 마음 써주셔서 감사해요."
정은의 감사 인사가 끝나자 성호 아버지는 벼르고 있었단 듯, 쏘아붙이며 말했다.
"네가 성호한테 결혼하면서 반지도 하나 안 사준다고 했다며!?"
"네?"
정은은 성호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니 억울해서 팔짝 뛸 노릇이었다.
"아버님, 저 성호씨한테 그런 얘기한 적 없어요."
정은은 억울해서 여러 번, 아니라고 말했지만 성호의 아버지는 정은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네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성호가 뜬금없이 나한테 그런 말을 하겠냐?"
정은은 성호에게 우스개 소리로 '결혼하는데 프러포즈는 못할 망정, 문방구에서 파는 500원짜리 장난감 반지라도 하나 사서 손가락에 끼워줘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얘기가 어떻게 예물해 달라는 소리로 둔갑해서 자신을 이렇게 난처하게 하는 걸까.....
집에 돌아온 정은은 남편 성호에게 따져 물었지만 성호는 정은이 말한 반지를 해줬으니 된 거 아니냐는 식이었다.
정은이 성호와의 결혼을 결심했던 이유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이 남자만큼은 기댈 어른 하나 없이 홀로 외롭게 자란 정은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줄 것만 같았다.
정은은 자신의 생각이 옳았던 것인지 스스로 되묻고 있었다.
남편으로서의 성호는 줏대없고 우유부단했다.
정은은 그제야 깨달았다.
결국 자신을 가장 힘들게 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남편 성호라는 사실을.....
그 생각이 머릿속에 또렷하게 자리 잡아갈수록 정은은 숨이 턱 막혀 왔다.